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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pr 12. 2021

사랑은 유리같은 것

인디아 하우스의 추억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이제 깨어지는 사랑의 조각들은

가슴깊이 파고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에요


슬픔은 잊을 수가 있지만 상처는 지울수가 없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질 뿐이에요

사랑하는 그대여 이것만은 기억해줘요

그토록 사랑했던 내 영혼은 지금 어두운 그림자뿐임을


절친 승희와 경주에 다녀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내가 옛날 노래 모음을 틀었는데 이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승희야, 이 노래 알아?

이게 무슨 노래지?

원준희의 사랑은 유리같은 것, 이거 나 중학교 2학년 때 나온 노랜데 이 노래 들으니까 또 추억 돋네...

무슨 추억인데? 하하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서 가장 예뻤던 진경이가 수업 시간에 앞에 나가서 불렀던 이 노래는 훗날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진경이뿐만 아니라 그때 그 추억이 떠올라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그때를 한번 회상해 보려 한다.






바야흐로 때는 2000년, 밀레니엄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그때 나는 미국의 보스턴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20대부터 틈만 나면 혼자서 여행을 다녔던 나는 일주일 동안 뉴올리언스에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새로운 장소에 대한 두근거리는 설렘도 함께.


재즈가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그곳에 가면 매일 재즈를 듣겠지?


사실 나에게 재즈는 듣기 좋은 편안한 음악이라는 외에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 그게 당시의 나에게는 아마 재즈였던 것 같다. 그래서 뉴올리언스라는 도시가 궁금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루이지애나 주를 방문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돈을 아껴야 했던 20대 때에는 주로 유스호스텔에서 숙박을 했던지라 그때에도 뉴올리언스 시내 중심에 있는 한 호스텔을 예약을 했고 무사히 새로운 그곳에 도착을 했다. 어릴 때니까 돈을 아껴야 하는 것도 있지만 혼자 여행을 하는 (특히 어린) 사람에게는 전 세계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 함께 여행을 다니기에 유스호스텔 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너무 재미있는 게 가장 큰 매력!)


인디아 하우스


그곳의 이름이었다.

이름답게 꽤나 힙한 곳이었는데 내가 도착한 그 시간에는 투숙객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도미토리를 예약한 나는 일단 방에 가방을 두고 리셉션에 가서 시내에 어떻게 가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숙소에서 나와서 시내 구경을 하러 갔다.


재즈로 유명한 도시답게 매년 2월에는 마르디그라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재즈 페스티벌이 열려서 그때는 방 구하기가 힘들 텐데 지금 잘 왔네, 하며 스스로를 칭찬해주고는 새로운 곳에 왔다는 사실에 흥분이 되어 룰루랄라 시내로 나갔다.


그런데 이런! 시내에 나가자마자 겁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흑인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었다. 재즈가 주로 흑인들의 음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흑인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동네에 살다가 처음으로 흑인들만 소복이 모여있는 것을 본 20대의 어린 나는 혼자 있는 그 상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 그냥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갈까?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는 배가 몹시나 고팠다. 그래서 일단 가까이 보이는 한 식당에 들어가서 케이준 샐러드와 맥주 한잔을 주문했다. 역시 난 본능에 충실했고 식욕은 무서움도 잠시 잊게 하는 갑 중의 갑이라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식당 안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흑인 아저씨들이었다. 그 시절에는 동양인이 눈에 많이 띌 때가 아니어서 아저씨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기는 했어도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 혼자서 괜히 겁을 먹었던 것이었다. 그들의 색깔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서는 검은색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그건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받아온 올바르지 않은 주입식 교육의 서글픈 결과물이었다.(아시다시피 지금 내 남편은 까만 남자다)


일단 굶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인디아 하우스로 돌아갔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다시 생각이 돌아왔고 혼자서 시내 구경을 하는 건 무리일 거라는 생각에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늦은 오후 시간이어서인지 돌아간 그곳에는 내 또래의 외국인들이 여럿 보였다. 다들 낮에는 어딘가로 놀러를  갔다가 늦은 오후가 되어 숙소로 돌아온 것이었다. 미국, 뉴질랜드, 호주,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20대의 청춘남녀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도 동양인이라고는 나 혼자였다. 또래의 그들은 자그마하고 긴 생머리의 뮬란처럼 생긴 동양 여자인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나도 금세 그들의 무리에 어울리며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좀 전까지 가졌던 두려움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렸는지 이제는 보스턴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다.


내 생애 첨 만난 스웨덴 국적의 남자가 와인을 한 병 사 왔다며 함께 와인을 마시자고 했다. 호스텔에는 당연히 와인잔이 없었고 우리는 그냥 작은 커피잔에 와인을 따르고는 호스텔 문 앞 계단에 앉아서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단발머리에 검정 뿔테 안경의 그 남자애가 자신의 나라인 스웨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추운 나라에 관심이 일도 없던 나에게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나라에 대해서 춥다는 것 이외에 특별히 아는 게 없었는데 그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스웨덴 이야기에 집중을 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 주위로 한 두 명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무리를 이루며 함께 와인을 마셨고 와인이 떨어지자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내일 미시시피강에 엘리게이터(악어) 투어 갈 사람?


저요 저요 하며 다 들 손을 들었고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음 날 함께 투어를 가는 것으로 하면서 그날 밤은 취하는 이 하나 없이 일찍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우리는 함께 미시시피 강에 갔고 2인 1조가 되어 카약을 타게 되었다. 2인 1조라는 뜻은 2명이 모두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도저히 노를 저을 자신이 없었다.(팔뚝은 굵은데 두부살이라 힘이 없다) 그렇다고 언제 다시 가볼지 모르는 미시시피 강에 갔는데 혼자만 타지 않고 숙소로 그냥 되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숙소를 가도 할 일이 없었다.


내 사정이 딱했는지 일행 중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빼빼 마른 미국 친구와 건장한 뉴질랜드 친구가 타기로 한 카약의 가운데에 깍두기처럼 앉아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작고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인 순간이었다. 내가 탄 카약만 3인승이 되어버리자 양쪽에서 열심히 노를 젓는 친구들에게 괜히 미안해졌고 카약에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게 민망하기도 해서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노래해 줄까? 한국 노래 듣고 싶어?


그들 둘 다 매우 환영을 하였고 그때부터 나는 노를 젓는 그들을 위해서 내가 아는 한국 노래를 총동원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게 노동요인지 가요인지 그들에게나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노래방이 생겨난 어느 날부터 우리는 가사를 외울 필요가 없이 스크린에 나오는 걸 보면서 따라 부르면 되었는데 내가 어릴 때에는 그런 게 없었던지라 나는 많은 노래를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틈이 생기지 않도록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노를 젓는 친구들은 무슨 노래인지 몰랐지만 신이 나서 더 열심히 노를 저어댔고 다른 카약에 타고 있던 친구들은 그들을 부러워하는듯했다. 그렇게 우리의 엘리게이터 투어는 흥겹게 마무리를 지었고 그 후에도 우리들은 매일 함께 놀며 순간의 추억들을 계속해서 쌓아갔다.


뉴올리언스가 18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운 좋게도 내가 갔던 그때(4월 말) 프렌치 쿼터 페스티벌이 열렸고 이국적이고 컬러풀한 프랑스식 집들이 모인 그곳에 가면 길거리에서나 무대가 있는 곳에서 재즈 공연을 맘껏 즐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공연을 보고 축제를 즐기며 흥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하룻밤만 더 자면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날따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떠서 창 밖을 보았는데 호스텔 마당을 쓸고 있는 한 남자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이였다. (아침이라) 전혀 꾸미지 않은 외모에 훤칠한 키의 그 남자는 약간 긴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언제 감았을까? 할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였는데 그의 외모에서는 광채가 나고 있었다. 내 생애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보았다. 띠용!(지금은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뭐야 저 남자.. 분명 호스텔 직원은 아닌데 왜 저기서 청소를 하고 있지?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눈곱만 대충 떼고는 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안녕! 너는 어디서 왔어?

크로에이쉬아

응? 어디라고?

크로에이쉬아

크로에이쉬아?(대체 거기가 어디지?) 스펠링이 어떻게 돼?

씨알오에이티아이에이(CROATIA)

아... 크로아티아!


아주 한국적인 발음으로 말을 하자 그는 하하 웃으며 맞다고 하였다. 들어본 적은 있는 나라인데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였다.


너는 왜 여기서 청소를 하고 있어?

아, 청소를 하면 무료 숙박을 할 수가 있거든. 그래서 매일 청소를 하는 거야.


그동안 내가 일찍 일어나지 않아서 그를 못 본 것이었다.(아 억울하다!) 그는 크로아티에서 형과 함께 어느 멋진 곳에서 바를 운영하는데 관광객들이 많은 6개월은 힘들게 일을 하고 나머지 한가한 6개월은 여행을 한다고 했다. 순간 그의 삶이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오래 여행을 하려면 경비가 많이 필요한데 이렇게 호스텔에서 청소를 하거나 다른 일을 도와주면 숙박을 무료로 할 수 있다고 팁도 알려 주었다. 참 생산적인 생각을 가진 멋진 친구였다.


우와, 그렇게도 여행을 할 수가 있구나. 대단한데!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뉴올리언스에서 나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그와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제안했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약속 없으면 내가 저녁 초대할게.

정말? 나 약속 없어.


내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웃기는 얘기지만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나는 서른 전에 남자에게 밥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오빠가 둘이 있고 오빠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내다 보니 내가 딱히 밥 살일이 없기도 했고 예전에는 지금과 분위기가 아주 많이 달라서 주로 남자가 밥을 사주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그랬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밥을 산다고 했던 것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호스텔 입구에서 만났다.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서 괜찮아 보이는 캐주얼한 식당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는 식사대접이 고마웠다며 술은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펍에 가서 맥주를 가볍게 마시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실컷 나누었다. 당시 나는 술을 잘 못 마셔서 맥주 두 병을 마셨고 우리는 늦지 않게 인디아 하우스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모두의 아지트인 부엌으로 갔다. 역시나 그곳에는 그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이 한 테이블에 소복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돌아온 우리들을 보더니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말했다.


얘들아, 나 내일 떠나.

아 정말? 벌써 떠나? 너무 아쉽다...

나도...


그러자 아주 예쁘게 생긴 한 여자애가 말했다.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나 한국 노래 듣고 싶어. 러브송으로.


내가 카약에서 노래를 한 걸 기억하고는 부탁을 한 듯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부탁을 하는 그녀를 따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라는 마음에 알겠다고 했다. 노래를 아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겠다는 일종의 국뽕도 순간 일조했겠지.


갑자기 까까머리의 건장한 독일 친구 세바스티안이 나를 번쩍 들어서 모두가 앉아있는 식탁 위로 올려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너무 놀랐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이크 할 만한 게 필요했다. 마침 식탁 벽에 공중전화 한대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화 수화기를 빼서 마이크를 삼아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같은 것...


내가 노래를 시작하자 모두들 대화를 멈추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식탁 위에 서서 노래를 하는 나를 우러러보았다. 그렇게 시끌하던 곳이 조용해지며 내 노랫소리만이 넓은 식당 안의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특히 나에게 코리안 러브송을 부탁한 그 여자애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와~하고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고 이 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유리같아서 쉽게 깨어지니 그래서  아픈 거라고 그래도 사랑은 해야 하는 거라고 설명을 하자 다 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끝나자 나를 올려주었던 세바스티안이 또다시 나를 번쩍 들어서 식탁에서 바닥으로 옮겨다 주었다. 세바스티안의 활짝 웃는 얼굴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노래는 끝이 났고 인디아 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들과 함께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해가 떠 오르자 나는 아침 비행기를 타러 인디아 하우스를 떠났다. 전날 밤, 까지 수다를 떠느라 모두들 새벽에 잠이 들어서 아침엔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미리 작별인사를 하였던지라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안에는 새로운 잊지 못할 엄청난 추억들로 벌써 자리가 꽉 차 버렸다.


인디아 하우스, 프렌치 쿼터 페스티벌, 미시시피강 엘리게이터 투어 그리고 사랑은 유리같은 것


내 어릴 적 뉴올리언스는 이거면 충분했다.


엘리게이터 투어를 하고 모두 함께 찍은 사진이 본가에 있었는데 그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순박한 함박웃음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사랑은 유리 같아서 쉽게 깨어지지만 인디아 하우스에서 쌓은 이토록 아름다운 추억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새록새록 올라오는 게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지우개가 들어있어서 웬만한 일들은 금세 잊어버리는 데 이십 년도 지난 이 추억은 아마도 평생 나와 함께하며 두고두고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띨 테지.


추억 부자인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머나먼 추억 하나에 행복해하며 이 추억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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