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바댁 린다 Sep 20. 2021

네가 낭만을 알아?

할아버지는 삼 형제의 가운데셨다. 위로 형님이 한 분, 아래로 동생이 한 분 계셨는데 동생은 떨어져 사셨지만 형님과는 시골의 한 마을에서 담을 맞대고 사셨다. 집 뒤편에 있는 담은 어린 시절 나와 사촌들이 재미로 넘나들수 있을 정도의 나지막한 흙담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5남매를 두셨고, 큰 할아버지는 8남매를 두셨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 되면 두 집이 어른들과 아이들로 시끌벅적해졌다. 할아버지 형님을 우리는 큰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큰 할아버지 댁은 우리들에게 큰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할아버지 댁을 작은집이라 불렀다.


추석이 되면 사촌뿐만 아니라 육촌들이 모두 모여 송편을 빚었고, 차례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지냈다. 할머니는 아궁이에 끊임없이 군불을 때셨고 군불 때는 게 재미났던 어린 시절의 나는 나뭇가지들을 주워와서 할머니가 안 계실 때 군불을 때우는 시늉도 했더랬다.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시고 늘 바삐 무언가를 하시던 할머니는 나만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재 가서 부지깽이 좀 가온나."


처음에는 정재가 어딘지 몰라서 엄마께 여쭤보았다. 부엌이라고 하셨다. 부지깽이는 불을 지필 때 쓰는 기다란 막대기라는 것도 엄마가 알려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재미있었다. 도시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우리만의 언어 같았다.


밤이 오면 나와 사촌들과 육촌들은 정해야 했다.


"니는 오늘 어디서 잘 건데?"


각자 자고 싶은 곳을 정해서 아궁이에 불을 땐 따끈따끈한 방에 한 줄로 쭈욱 누워서 자던 때였다. 주로 각자의 할머니 댁에서 자긴 했지만 가끔씩은 큰집에서 또래의 여자애들이랑 자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엄마의 허락을 받으면 되었다. 우리에겐 사촌과 육촌의 개념이 별로 없었다. 그저 우리는 한 가족일 뿐이었다.


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집 삼촌이든 큰 집 삼촌이든 나에게는 모두 삼촌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부산 사나이인 마도로스 삼촌을 가장 좋아했는데, 성격도 좋고 내 눈에 참 잘 생겨 보이던 삼촌은 재미도 있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내가 삼촌을 특히 좋아하는 걸 아셨는지 삼촌도 나를 많이 이뻐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종다리 아지아가 도착하셨다고 하면 달려 나가 삼촌에게 맨 먼저 안겼더랬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지아'라는 말 '삼촌'이라는 말로 자연스레 바뀌었고, 어릴 때는 반말을 하며 친하게 놀았는데 그 반말을 계속 쓰기엔 애매한 상황들을 겪으며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아지아라고 부르며 친구처럼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시간은 모든 걸 변하게 했다.


세월의 흐름은 자연스레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모셔갔다. 그러자 주인을 잃어버린  추억 가득했던 집도 자연스러운 수순인 양 팔아버려서 더 이상 명절에 시골에서 모이는 일은 없었다. 대신 큰집은 나의 부모님 댁에서 모였다.






얼마 전에 한 육촌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늘 내가 바빴던 탓이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에 갔다가 내 번호를 새로 받았다고 하면서 연락을 주었는데 어릴 적에 수줍음이 많았고 착했던 동생은 멋진 경찰이 되어있었다. 서울말을 쓰던 그 쪼그맣고 귀여웠던 아이가 결혼을 했고 아빠가 될 예정이었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는데 내 나이를 돌아보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동생을 통해서 나는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시골에서 함께 뛰어놀던 그 시절.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 바지를 걷고 들어가서 우리들은 고디를 잡았고, 그 고디를 한가득 가져오면 숙모가 작은 양은냄비에 넣어서 끓여주셨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바늘로 콕콕 집어서 알맹이만 쏙 빼먹었다.


큰 댁과 작은댁을 다닐 때에는 항상 뛰었다. 바쁜 일도 없었는데 우리는 늘 뛰어다녔다. 겨울에는 경사진 얼음 위에 짚단을 깔고 앉아서 미끄럼을 탔다. 꽁꽁 얼어붙은 논에서는 썰매도 탔더랬다. 맑은 공기로 가득 찬 시골의 겨울은 도시의 겨울보다 더 추워서 우리는 늘 볼이 빨갰고 호호 손을 불어가면서도 그렇게 밖에서 뛰어놀았다.


아, 이런 게 낭만이겠지?


지금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요즘 아이들은 낭만이 무언지 알까? 알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낭만과 그들이 생각하는 낭만은 다르겠지?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다. 그 시절 우리는 낭만을 먹고살았다는 것을. 그 시절의 우리는 참 맑고 순수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 추억할 수 있는 낭만적인 나날들이 있었다는 건 실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낭만을 억할 수 있게 해 주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감사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유리같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