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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Sep 29. 2021

삶은 땅콩의 추억


추석 때 본가에 갔다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엄마가 과일이랑 송편을 싸 주셨어요.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엄마는 늘 그러시잖아요. 하루 전 날에는 큰오빠와 작은 오빠도 엄마가 싸주신 음식들로 양 손이 무겁게 떠났고요. 저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가는 게 힘들다며 사과도 큰 것 말고 작은 것 여섯 개랑 귤 조금 그리고 송편 조금만 싸 놓았는데 떠나기 삼십 분도 채 안 남았는데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니 땅콩 좀 가져가서 삶아 먹을래?"

"땅콩? 왜 인제 얘기하노? 삶아놓은 거 없나?"


삶은 땅콩을 좋아하는데 먹어본 지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야 땅콩이 있다는 걸 알려주신 엄마께 살짝 투정을 부렸어요. 내가 가져가서 어떻게 삶냐고(삶으면 되지만 괜히...), 미리 좀 얘기했으면 좋았을 걸, 하다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여있다 삶은 땅콩"


그새 엄마가 땅콩을 삶으셨어요. 제가 땅콩을 먹고 싶어 하는 걸 아시고는 재빨리 행동에 옮기신 거였어요. 역시 엄마밖에 없어요. 그 땅콩을 가져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모조리 까먹었어요.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려서 허무하기까지 했어요.






땅콩을 보면, 특히 엄마가 삶아주신 땅콩은 저를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의 가을 운동회로 데려다 주어요. 요즘에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적에는 가을이 되면 가을 운동회를 했는데 저에게 가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삶은 땅콩과 삶은 밤이에요. 물론 그날이 되면 엄마는 김밥도 싸고 이것저것 먹을 걸 많이 준비하셨지만 저에게는 땅콩이랑 밤 삶은 게 최고였어요. 특히 삶은 땅콩. 톡 하면서 까먹기도 좋고 입 안에 들어갔을 때 아삭아삭 씹히는 그 느낌도 좋아요. 물론 맛은 말할 것도 없고요.


가을 운동회 하면 떠오르는 사진이 한 장 있어요. 어제는 생각이 안 났는데 이제 나네요 그녀의 이름이. 손영주.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저는 그녀와, 저의 엄마는 그녀의 엄마와 친하게 지냈거든요. 한번 더 생각해보니 엄마끼리 더 친하셨던 거 같아요. 우리 넷이 운동장 한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환하게 웃게 있는 사진이에요. 보따리에는 두 분의 엄마가 싸 오신 음식이 한가득이고요. 두 엄마와 저는 활짝 웃고 있는데 영주는 햇살이 눈이 부셔 찡그리고 있어요.


어쩌다 찾은 추억의 운동회 사진

당시 저는 유치원생이었는데 같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오빠들의 가을 운동회에 놀러 간 거였어요. 엄마랑 영주랑 영주 엄마랑 같이 김밥도 먹고 땅콩도 까먹고 엄마가 작은 숟가락으로 퍼서 제 입에 넣어주시는 삶은 밤도 맛나게 쏙쏙 받아먹었지요. 마치 새끼 새처럼요.


엄마에 의하면, 어린 시절 저는 굉장한 먹보였대요. 하도 먹어서 엄마랑 아빠가 교대로 밥을 드셨대요. 밥이 보이기만 하먹어서 아랫목에 둬야 하는 밥을 제가 손이 안 닿는 위쪽에 숨겨 기도 하셨다며 저의 대단한 먹성에 대해서 지금도 한 번씩 말씀을 하시는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너무 재미있어요.


한 흑백사진이 그걸 증명해 주었어요. 큰 오빠, 작은 오빠, 저 이렇게 셋이 나란히 서 있는데 큰 오빠는 차렷 자세로 웃고 있었고 작은 오빠는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어요. 큰 오빠 아이스크림까지 제가 들고 있는 거예요. 맘 좋은 큰 오빠가 제가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하자 그냥 주어서 큰 오빠 손에는 아무것도 없고요. 그래도 웃고 있어요. 속이 참 좋았나 봐요. 그때의 큰오빠는.


사진으로만 기억을 하는 어린 시절이지만 엄마가 이야기를 찰지게 잘하셔서 들을 때마다 재미있어요.


"아이고 말도 마라. 니 그때 얼마나 묵었는지 아나? 그래서 볼이 이래 퉁퉁했데이. 근데 희한하게 유치원에 가더니 숟가락을 탁 놓데. 하하하"


삶은 땅콩이 저를 가을 운동회로 그리고 먹보였던 옛날로 데려다주었네요.


그리워요 그 시절, 가을 운동회도 엄마가 까 주시던 삶은 땅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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