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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Sep 16. 2021

쿠바 할머니의 만 88번째 생신


'자기, 내일이 할머니 생신이야.' 


내가 전화를 못 받자 남편이 문자를 남겨놓았다.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의 만 88번째 생신이 다가오자 남편은 평소보다 바빠졌을 테다. 나에게 일일이 말하지는 않았어도 남편이 할머니 생신 때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지는 보내준 사진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만 88세 할머니의 생신상


덩그러니 케이크 하나와 할머니를 위한 주스 한통 그리고 탄산음료들만 생신상에 놓여 있지만 저 예쁜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 또 88이라는 숫자가 있는 특별한 초를 사기 위해서 남편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알아보았을 테다. 게다가 한때 인어공주셨던, 바다를 사랑하시는 할머니를 말레꼰으로 모셔가기 위해서 남편은 하루 전 날 택시기사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미리 택시를 예약했을 테고.


할머니 생신을 맞이하여 말레꼰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간 남편


사진을 보는 데 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가 있었으면 다른 음식을 좀 장만해 드렸을 텐데... 괜히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안심이 되었다. 행복하셨다 할머니가. 그럼 된 거다.






올해만 88세,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90세인 할머니는 12남매의 첫째로 태어나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다 키우셨다고 했다. 동생 네 분을 먼저 떠나보내셔서 할머니는 아마도 마음 깊은 곳에서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이 많으신 듯했다.


내가 쿠바에 있을 때 할머니 동생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저 멀리 시골에 살고 계셔서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것도 보지 못하셨다. 그저 집에서 소식을 들으며 마음만 아파할 뿐이셨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래서 할머니 댁에 도착을 했고, 남편이 할머니를 안아드리자 할머니는 남편의 품에서 펑펑 우시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런 할머니를 꼭 껴안고 함께 눈물을 글썽이며 할머니를 어루만져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만지듯 그렇게.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남편은 그들에게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가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특별한 대책 없이 소련의 원조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갑자기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 난리가 난 것이었다. 제1 특별 시기가 시작이 되었다.


그때 태어난 지금의 젊은이들 중에는 치아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이 꽤 많이 있다. 먹을 게 없어서 성장에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편은 어느 회사의 디렉터이셨던 할아버지와 국가대표 선수 셔서 외국으로 시합을 하러 다니시면서 음식을 공수해 올 수가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먹고 살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키가 이렇게나 클 수가 있었다고 말하며 고마워했다. (시아버지와 남편 모두 키가 193cm이다)


그러다가 남편이 군대를 가게 되었고 군대에 있을 때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각별한 관계였던 남편이 할아버지 임종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사에게 요청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고 남편은 지금도 그때 상황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래서 홀로 남아 계시는 할머니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참 멋쟁이셨고, 어디를 가시든 남편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많은 걸 알려주셨다고 했다. 사진에서 본 할아버지는 참 멋지셨다. 무남독녀인 딸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나의 남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셔서인지 남편도 사랑이 참 많다. 게다가 신사인 할아버지와 숙녀인 할머니께 제대로 예의범절을 배워서인지 남편은 예의도 참 바르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이 살면서 겪어보니 남편의 고귀한 품성과 품위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게 형성이 되는 어린 시절의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주시고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셔서 남편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충분한 멋진 사람으로 성장을 했으니 말이다.


나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시는 흥이 많은 이모할머니 한 분이 말씀하셨다.


"린다, 우리는 자랄 때 언니가 이야기해주는 동화가 가장 재미있었어."


지금도 시를 쓰시는 할머니는 예전에는 동화도 직접 쓰시고는 그 동화를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셨다고 다. 문학소녀이신 할머니는 자신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고 쿠바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파티도 좋아하지 않으신다. 가족들이 모여서 모두가 흥에 겨워 춤을 추어도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바로 할머니와 내 남편이다.(남편은 나랑은 잘 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께는 휑해 보이는 간소한 생일 상차림이 오히려 좋으신 것이었다. 그저 사랑하는 딸이랑 손자랑 함께 집에서 조용히 초를 불고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실 수 있는 바닷가에 가셔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 시간이 최고의 선물인 것이었다.


예전부터 지병이 있으셔서 약을 꼬박꼬박 드셔야 하는데 요새 쿠바에는 약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원래도 쉽지는 않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약이 더 귀해져서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건강하게 지내시는 할머니를 보니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지금처럼만 계속 지내시면 할머니의 100세 생신도 맞이할 수 있을 텐데.


할머니, 조금만 더 힘내셔서 100세 생신에는 친지들 초대해서 파티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지난번에 초대받아서 갔었던 할머니 친구분 100세 생신 파티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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