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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Sep 19. 2021

하늘을 보자 그날이 떠올랐다

쿠바에서 생긴 일


운을 타고난 건지 20여 년 동안 혼자 여행을 하면서 나는 사고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안 좋은 일은 모두 서울에 살면서 겪었지 외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랬는데 처음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처음으로 간 쿠바에서.


그러고 보니 4년이 되었네. 내가 쿠바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게. 추석 연휴 때 혼자 휴가로 쿠바에 갔었고 2주 동안 바닷가 시골 마을 숙소에서 숙소 주인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제대로 쉬고 있었다. 내 휴가는 늘 그러했으니.


그런데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쿠바까지 왔는데 아무리 현지인들과 얘기하고 노는 게 재미있어도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바나 시내에 있는 여행사에 가서 쿠바 최대의 휴양지인 바라데로의 올인클루시브 호텔(식사, 음료, 해양스포츠 등 모든 게 포함된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카리브해의 바다에서 2박 3일간 혼자 있는 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서 있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혼자서 너무 심심했다. 게다가 내가 예약을 한 그 호텔은 성인 전용이 아니라 가족들이 많이 오는 곳이어서 대화를 나눌 사람이 보이지가 않았다.


보통 혼자 여행을 가면 혼자 온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만나게 되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밥도 먹고 놀러도 다니면서 외로울 틈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인지 외로움이 밀려왔다. 어쩌면 짧은 시간 동안 친해져 버린 쿠바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그 외로움이 더 깊어졌던 것일 수도 있었을 테다.


결국 나는 그 멋진 휴양지에서 2박을 채우지 못하고 둘째 날 늦은 오후에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했고 호텔 앞에 있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와야 하는 내가 하루 일찍 숙소에 도착을 하자 모두들 깜짝 놀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냥 혼자 있는 게 너무 외로웠어. 너희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왔어."


그러자 주인의 조카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린다, 너 아바나에 있는 클럽 가봤어?"

"아니, 안 가봤는데."

"잘됐다. 그럼 우리 오늘 밤에 클럽 갈래? 갔다가 아바나에 있는 우리 집에서 같이 자고 내일 여기로 다시 오자."


딱히 할 일이 없었던지라 알겠다고 하고는 클럽에 갈 준비를 했다. 주인의 조카는 미모가 뛰어난 23살의 쿠바 여자애였고 나는 그녀가 당연히 클럽을 잘 알거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쿠바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클럽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클럽이 괜찮은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은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그날 밤 그녀와 나는 이웃인 택시 기사에게 택시비만 꽤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속된 말로 삥 뜯긴 거였다. 쿠바인이지만 쿠바의 현실을 모르는 어린 조카와 그녀보다 쿠바를 더 모르는 어리바리한 아시아 관광객인 나는 택시기사에게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된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한 시간을 넘게 돌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클럽을 발견하지 못하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간 클럽에서 잠깐만 놀다가 집으로 가기로 하고는 택시에서 내려 입장료를 끊고 들어갔다. 쿠바에서 처음으로 가본 클럽이었다. 작은 공간에 수많은 현지인과 외국인들이 뒤섞여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모히또를 마시며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우리도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고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일단 돈을 내고 들어왔으니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가 취해버렸다. 취했으면 그냥 집으로 갔으면 되는데 그녀가 나에게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나 어린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따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고 웃었는데 금세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화가 난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택시비도 내가 냈고 입장료도 내가 냈는데 그녀는 돈 얘기를 하면서 따지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제대로  다투게 되었고 급기야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가진 현금 600유로를 도둑맞으면서 그날 나는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는 현금을 많이 들고 다니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남은 현금을 모두 가지고 나왔고 가는 날이 장날이 된 것 마냥  그런 일이 생겨 버린 것이었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더니 그날이 그랬다. 불빛도 없는 깜깜한 새벽에 혼자 아바나 시내에 남겨진 나는 몹시 두려웠다. 낯선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해서 몹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돈까지 사라져 버린 걸 알고 나자 놀라움과 서러움이 한 번에 올라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결국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고 어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택시를 타게 되었다.


멍하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가다가 창밖을 보았는데 하늘이 불타 오르고 있었다. 동이 트는 쿠바의 하늘이 말도 못 하게 예뻐서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서 택시 안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는 그 와중에 하늘을 보고는 자동반사처럼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그날의 쿠바 하늘. 사진은 이정도지만 실제로는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이른 아침에 외출을 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정류장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는데 그날의 쿠바가 나타났다. 붉은 하늘이 내 눈앞에 펼쳐진 걸 보자 그날이 떠올랐다.


오늘 이른 아침 한국의 하늘


숙소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멍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날 저녁에 자신의 조카 때문에 안 좋은 일을 당한 걸 알고는 미안했던지 숙소 주인이 나를 아바나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 종합 전시회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가 입장료도 내고 저녁도 사주었다.


그리고 그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하늘이 미안해서 나에게 준 선물이었을까?


이래서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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