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바댁 린다 Nov 13. 2021

이사로 확인된 숨겨진 나의 식탐

쿠바에 살기 전 나는 식탐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식 재료의 부재와 음식 구하기가 힘든 특수한 환경에 의해 임시로 생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먹을 것이 풍부한 한국에 오면 먹는 것에 연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까운 분께서 내게 식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반문했지만 그분의 말씀이 맞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최근에 있었다. 이사였다.


몇 개월간 임시 숙소에 살다가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잠시나마 정들었던 그곳을 떠나는 데에 가장 아쉬운 게 음식이었다. 떠날 때가 다가오자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 중에서 맛있었던 걸 한 번이라도 더 먹어봐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이글이글 타올라 할 일이 태산인 와중에 발걸음은 이미 빵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삼십 분을 걸어가서 내가 산 건,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서 가장 맛났던 식빵과 요즘 핫한 소금빵, 딸기가 박혀있는 입에 살살 녹는 케이크 비슷한 빵과 초콜릿이 발린 미니 브라우니 그리고 보기만 해도 포르투갈이 떠오르는 에그 타르트까지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의 빵이었다. 다 먹을 수 있을지는 생각지도 않고 일단 사고 보자는 마음으로 봉투에 담아 흥분된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역대 가장 많이 사 본 식탐이 부른 빵 쇼핑

나는 빵순이가 아니다. 한 번씩 빵을 먹긴 해도 이렇게 많은 양의 빵을 한 번에 사 본적은 처음이었다. 최근 몇 달간 탄수화물을 줄이느라 밥도 별로 안 먹었는데 그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릴 정도의 양이었다. 빵에서 그치면 좋았겠지만 동네를 떠난다는 아쉬움은 집 근처에 있는 무떡볶이와 후라이드와 양념의 반반 치킨까지 이어졌다.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이유로 떡볶이도 잘 안 먹었고 치킨은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그것마저 아쉬움이 들어 매일 하나씩 사 먹었다.

매콤한 무떡볶이와 순대의 혼떡세트

한동안 매일 막창이 먹고 싶어서 식당에 혼자 가서 막창 2인분씩을 먹었는데, 날씨가 싸늘해지자 샤브샤브가 미칠 듯이 당겨 알배추며 버섯과 각종 야채들을 사서 집에서 매일 야채 샤브샤브를 해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을지로 노포에서 몇 년 만에 만난 동생들과 양념갈비를 먹고 나서부터 양념갈비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늦은 밤에 배달앱을 열어 양념갈비를 배달시켜 먹기도 했다. 배달 음식을 잘 먹지도 않았지만 10시가 넘은 시간에는 음식 자체를 먹지 않았기에 갑자기 변화한 내 모습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어색함도 잠시일 뿐, 양념갈비가 어찌나 맛나던지 떠나기 전 날 밤 짐 싸는 도중에 한번 더 시켜서 먹으며 아쉬움을 달래었다.

을지로 노포의 양념갈비
늦은 밤 먹었던 입에서 살살 녹던 배달 양념갈비

2007년에 한 달 동안 태국에 간 적이 있었다. 배낭여행처럼 방콕부터 북쪽에 갔다가 남쪽에도 가며 많은 곳을 여행했는데 한 달 후 한국에 와서 가장 아쉬웠던 게 사람도 경치도 아닌 음식이었다. 아시아 음식 중에 태국 음식을 가장 좋아하기도 해서 태국에 있는 동안 좋아하는 걸 실컷 먹었는데도 돌아오니 또 생각이 나다니… 그때는 그저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사를 겪으며 내가 이렇게도 음식에 욕심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이제는 나에게 식탐이 있다는 걸 당당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본가에 돌아와 몇 달 만에 체중을 재어 보았다. 청바지가 꽉 끼는 걸 보며 살이 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숫자로 확인하니 내가 많이 먹긴 했구나, 이제 좀 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몇 달 동안 꾸준히 운동하면서 몸이 단단해진 덕에 지방보다 근육량이 늘었을 거라 위로 아닌 위로도 해 주었다. 오늘 아침에는 얼굴이 부어서인지 볼을 만져보니 탱탱해져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빠지라는 뱃살은 안 빠지고 얼굴살만 자꾸 빠져서 속상했는데 탱탱한 볼을 만지면 기분이 좋았지만 부은 게 비단 얼굴만이 아니라는 게 함정이었다.


쿠바에 가면 다시 살이 빠질 테니 현재의 식탐은 귀엽게 봐줘야지. 그리고 이제는 받아들여야겠다. 예전부터 나에게 식탐이 있었음을, 식탐이라는 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