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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r 06. 2022

나는 자기가 다시 회사에서 일했으면 좋겠어  

23킬로에 맞춰 꽉 채운 커다란 트렁크 2개가 방 한쪽 옆에 고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는 떠나기 전 PCR 검사를 어디에서 하는 게 조금이라도 저렴한 지 알아보며 혹시라도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보건소에서 무료로 발급해주는 한글 PCR검사지를 영문으로 받게 되면 12만 원이 넘어가 버린다는 게. 가격도 병원별로 달랐다. 저렴한 데가 12만 원대, 비싼 곳은 15만 원도 했다. 돈 쓸데도 많은데 PCR 검사에 십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쓰는 게 너무 아까워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병원을 발견했다. PCR 검사를 하고 영문 검사지를 받는 게 3만 원이 안 되었다. 순간 한줄기의 희망이 나에게 내려온 것만 같았고, 항공기 탑승 72시간 전에 가서 검사를 해야 했기에(현재는 48시간이다) 병원 정보를 캡처해서 잘 저장해 놓았다.


떠날 날이 다가오고 다시 점검을 하느라 병원 웹사이트를 방문해보니 글쎄, 정부 지침으로 PCR 검사 가격이 12만 원대로 인상되었다는 공지가 눈앞에 떡하니 들어왔다.


헉, 이게 뭐야? 왜 하필 지금...


너무 놀라 얼른 인천공항 병원 사이트를 방문했다. 인천공항 1 터미널에 있는 인하대병원에서 한글 PCR검사지를 영문 PCR검사지로 변환해주는데, 비용이 3만 원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저 병원에서 PCR 검사를 못하게 되면 보건소에서 받은 한글 PCR검사지를 인천공항 병원에서 영문서류로 변경하려고 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인천공항 병원 영문 PCR 변환 서비스도 막을 내렸다고 공지에 쓰여 있었다. 힘이 쭉 빠졌다.


비용이 어디나 비슷한 거면 인천공항에서 PCR 검사를 하는 게 가장 나았다. 인천공항 병원 예약 사이트에 접속해서 예약할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시간을 잘 맞추지 않으면 PCR검사지를 받을 수 없기에 이 예약을 위해서 미리 세워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서울에서 가는 거였으면 항공기 시간과 상관없이 택시를 타고 인천공항에 가면 되었지만, 나는 당시 대구 본가에 있었기에 공항에 가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예전에는 늦은 밤과 새벽에도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타본 적은 없지만), 코로나 19 영향으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2, 3대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결국 인천공항 근처에서 일박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인천공항 1 터미널에 호텔이 있었고 그곳에 예약할 수가 있었다.


내가 이용할 러시아 항공은 2 터미널에서 탑승을 하기에 2 터미널에 호텔이 있으면 좋겠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안타깝게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도 인천공항 내에 호텔이 있는 게 어디냐며 1 터미널에 있는 다락 휴 호텔 1인실을 예약했다.


그리하여 나의 최종 계획은, 대구에서 오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 2 터미널에 오후 3시경 도착을 해서 한진택배에 수하물을 맡겨둔 다음, 터미널 1로 이동해 인하대병원에서 PCR 검사를 하고 그날 영문 검사지를 받는 거였다. 검사지를 받으면 그곳에 있는 공항 호텔에서 숙박 한 다음 새벽 5시에 2 터미널로 이동해서 한진택배에서 트렁크 2개를 찾은 후 비행기를 타는 거였다.


거의 일 년 만에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국제커플이 나와 같은 힘듦을 경험하고 있을 테니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계획을 다 세우고 모든 예약을 마치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여느 날처럼 밤에 남편과 화상 통화를 했는데 남편이 몹시 힘들어하고 있었다. 2021년 1월 1일에 쿠바 정부가 화폐통합을 발표 후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버렸고 원래도 구하기 힘든 물자가 더 구하기 힘들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쿠바도 직격탄을 맞아 첫 번째 특별 시기를 겪으면서 쿠바 역대 가장 살기 힘든 시기를 겪게 되었는데 그때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내가 쿠바에 있을 때 제2 특별 시기를 겪어봐서 남편이 하는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런데 남편 상태가 예전과는 달랐다. 그동안 남편과 나는 힘들 때마다 서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실어주며 잘 살아왔는데 이제 남편의 에너지가 완전 고갈이 되어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면 남편이 저런 말을 할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며칠만 있으면 내가 엄청난 물건들을 가지고 쿠바에 도착할 텐데 그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다며 한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고 나는 그런 남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잠을 뒤척이다 새벽 일찍 남편에게 전화했다. 한참을 이야기한 후 마지막에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자기, 나는 자기가 다시 회사에서 일했으면 좋겠어."


그 한마디에 모든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이 미래를 굉장히 불안해한다는 걸. 쿠바에서 살려고 모든 걸 정리하고 새로운 곳에 가서 집도 사고 수리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이것저것 준비했는데 코로나19로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자 더 이상 그곳에서 하늘만 보고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고 남편과 시댁을 책임져야 하는(현재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한국에서 살기로 계획을 변경했고 한국에서 뭘 하며 먹고살지에 대해서 얘기했다.


퇴사 후 나는 한 번도 다시 회사에서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변화한 세상에서 남편과 새로운 일을 해보고자 계획했다. 안정적인 걸 추구하고 돈은 몸을 써서 일해서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남편에게 나의 계획은 뜬 구름 잡는 소리 같았을 테고, 그의 눈에 나는 이상주의자로 보였을 테다. 남편은 내 계획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결국 폭발했다.


회사에서 다시 일했으면 좋겠다는 남편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곧 남편의 마음을 알아채고 알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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