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마음먹은 게 하나 있다. 살림을 늘리지 않겠다는 것. 꼭 필요한 것만 사기로 했다. 물건을 살 때에는 몇 번을 생각한 후에 샀다. 가만히 보니 내가 가장 탐내는 물건은 주방용품들이었고 가장 욕심이 없는 것은 옷이었다. 예쁜 그릇들과 주방용품들을 판매하는 사이트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가며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졌고, 내 안의 악마(?)가 나타나서 나를 꼬드기며 속삭이고 있었다. "저 그릇에 음식을 담아 내놓으면 때깔이 다를 테야." 그럴 때마다 참을 '인'을 새기며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겼고 그저 온라인 사이트를 보면서 만족하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어느 날 큰 오빠네가 놀러 왔다. 올케가 옷걸이에 걸린 내 옷들을 보더니, "아가씨, 옷이 이게 다야?"라고 하며 놀라는 듯했다. "언니, 대충 그게 다예요. 서랍에 몇 개 있긴 한데 거기 옷들만 입어요. 집에서 일하고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까 옷이 별로 필요가 없네요." 결혼 전 혼자 살 때 내 방 중 하나는 옷방이었고 더 이상 옷 걸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걸려있었는데 지금 나의 옷장에는 여백의 미가 돋보이니 올케가 놀랄 수밖에.
그 후 인터넷 여성복 쇼핑몰에서 일하는 올케가 옷을 한가득 보내왔고, 친한 언니가 안 입는 옷을 주어서 더 이상 여백의 미는 돋보이지 않게 되었다. 수년 전에 산 옷 몇 개를 입고 또 입어서 옷이 늘어나긴 했어도 여전히 나는 그 옷들이 좋았고 다른 옷을 사고 싶다는 욕구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잠시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쿠바에 옷을 다 두고 온 나는 작년에 당근 마켓에서 저렴하게 옷을 몇 개 샀었고, 그 옷들로 불편하지 않는 생활을 잘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운동할 때 입는 바지가 낡아 보여 올케랑 남대문에 갔다가 만원 주고 운동복 바지 하나를 샀는데 그 바지가 어찌나 맘에 드는지 잘 때와 누구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늘 그 바지를 입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니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건 확실히 좋았다.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게 잘 되어 남편이 4월 초에 오게 되면 아마도 옷장의 여백의 미는 사라질 수도. 옷은 많지 않지만 패션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한국에 살면 남편 옷이 아마 옷장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집에 물건이 많지 않다 보니 정리할 것도 많지 않고 어지러워져도 금세 치울 수가 있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여백의 미가 좋긴 한데 새하얀 벽지로 둘러싸인 공간이 너무 휑해 보여서 액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바에서 찍은 컬러풀한 사진들을 인화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곳을 갤러리처럼 만들어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 나는 미니멀리스트는 그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예쁜 것들을 보면 없었던 이야기로 해 버리고 싶고... 어찌 되었건 이 집에서만은 미니멀리스트로 살아보아야지. 아마도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기회일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