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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r 25. 2022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이런 것

글로벌 오지라퍼 독일인 친구를 소개합니다

2017년 10월, 쿠바 여행에서 다녀와 친구를 만났다. 그녀가 최근에 알게 되었다는 명동의 어느 트렌디한 호텔 루프탑에 있는 야외 레스토랑의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나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야간에 빛나는 조명보다 우리 둘의 눈빛이 더 반짝이던 때였다.


그녀가 물었다.


"린다, 그 남자 몇 살이야?"

"아 그게.."

"내가 맞춰볼까?"

"하하 그래 한번 맞춰봐."

"스물여덟 살?"

"어머 뭐야, 어떻게 알았어?"


놀라는 나를 보며 친구는 무슨 예감이 들었다며 조단의 나이를 정확히 맞추었고, 내가 쿠바를 떠나기 34시간 전에 만난 이 남자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했다. 감이 좋은 그녀는 이 남자의 순수함을 높이 평가했다.


나의 힘겨운 초대로 2018년 6월 초에 그 남자가 한국에 도착했고(그전에 내가 2개월간 쿠바에 다녀왔음) 나의 반쪽이 될지도 모르는 그를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태리 식당에 초대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선물을 하나 주었는데, 본인이 직접 만든 작품이었다. 철사 하나로 우리 둘을 표현한 너무나도 감동적인 액자였다. 속옷 디자이너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손으로 만드는 건 다 잘하는 재주꾼이었다.


넷이 첨 만났던 이태리 식당

그녀와 그녀의 남편 모두 조단을 참 좋아했다. 내가 조단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도 그녀는 나의 결정에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내었고, 이들은 나의 결혼식에서도 빛을 발해 주었다.






나와 그녀의 인연은 10년 남짓된 듯하다. 세계적인 글로벌 회사의 임원인 그녀의 남편이 당시 내가 일하던  회사의 고객이었고, 주로 팀원들이 고객들을 직접 만나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우연히 내가 이 친구의 비자 신청을 도와주게 되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집까지 내가 구해주면서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다 보니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고 또래인 데다 아주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라 성격도 잘 맞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친해진 것이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그녀는 얼핏 보면 깐깐한 듯 보이지만 나는 그녀를 감히 (나를 능가할만한) '글로벌 오지라퍼'로 명명하겠다. 어떨 때 보면 여우 같다가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거나 착한 이들을 보면 어떻게 하면 자신이 도울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걱정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런 오지라퍼이다.


대한민국을 무척이나 사랑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다른 주재원들과 달리 그 어렵다고 하는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해서 어떻게든 사용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으로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우리 고유의 따뜻한 정을 흠뻑 만끽하였다. 한국을 떠날 때 어찌나 슬퍼하던지.. 결국 올 9월에 한국을 방문한다고 해서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국에서 5년 동안의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그들이 이주하게 된 나라가 파나마였고, 당시 나는 쿠바에 살고 있었기에 우리는 쿠바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파나마로 잠시 오신 그녀의 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셋이서 나와 조단을 방문하러 온 것이었다. 쿠바에서 다시 만나다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기에 몹시 흥분된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식중독으로 그녀는 삼 일 후에 떠나게 되었지만 짧게나마 만나게 되어 몹시 행복했었다.


쿠바에서 우리 넷

쿠바에 와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또 짧게나마 직접 보면서 실상을 알게 된 그녀는 그때부터 나와 남편을 더욱더 응원하였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면 연락해서 안부를 확인하였다. 그러다 내가 혼자 한국에 오게 되었고, 원래도 물자가 부족하지만 코로나 19로 약 구하는 게 더 힘들어져서 할머니 약을 구할 수가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연락하게 되었다.


부탁을 잘하지 않는 나의 성격을 알고는 파나마에 살고 있는 자신이 쿠바에 물건을 보내는 게 나을 거라며 필요한 게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전부터 부탁을 했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부탁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였는데 상황이 심각해지자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가장 필요한 게 약이라 약을 부탁했는데, 그녀가 여러 군데의 우체국에 확인을 해 보니 쿠바에 약은 금지품목이라 보낼 수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독일에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연락을 해서 독일에서 보낼 수 있는지 확인해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괜찮다고, 그러지 말라고 하자 그녀는 코로나 상황을 봐서 자신이 직접 쿠바에 가겠다고 하였다. 다행히 조단의 한국행이 확정되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조단의 한국행에 문제가 생겨 결국 못 오게 되자 그녀는 또다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조단과 가족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그러던 중 그들의 콜롬비아로의 이주가 확정되었고, 나기 전 어느 섬으로 여행을 갔다가 한 쿠바 커플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사교성이 좋은 친구 커플이 쿠바 커플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에게 쿠바에 살고 있는 딸이 있어서 매주 쿠바로 패캐지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보았고, 결국 파나마에서 쿠바로 물건을 보내주는 에이전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며 무슨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뻐했다. 이런 건  파나마에 거주하는 쿠바인들만 아는 정보일 테다.


한 번에 1.4kg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그녀는 이미 할머니에게 필요한 약과 가루우유를 많이 사놓았고 나에게 연락해서 할머니께 더 필요한 물건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남편에게 연락해서 필요한 약 리스트를 받아서 그녀에게 보내었더니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약들을 구입한 후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파나마를 떠나는 그녀였기에, 친구가 알게 된 쿠바 아주머니의 연락처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고, 만약을 대비해서 약값 영수증들을 나에게 보내주었는데, 합산해보니 금액이 자그마치 430달러 정도가 되었다. 에이전시에 주는 비용이나 배송비까지 하면 족히 500달러는 넘을 것 같았다.


몹시 부담스러웠다. 내 남편과 남편의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도와주려고 애쓰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고맙고 또 고마우나 그냥 넙죽 받기만 하는 건 좀 아닌듯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너무 고마운데 좀 부담스럽긴 하다고 말했더니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 린다. 네가 정 부담스러우면 나한테 200달러만 보내. 그리고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는 말 안 하는 걸로 해. 괜찮지?'

"응, 좋은 생각이야. 알겠어."

"그리고 네가 보내는 200달러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해서 돕는 데 사용할 거야."


어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친구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가!


어젯밤에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의 ID 번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보내주었더니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고마운 건 나인데 말이다.


고맙다는 말을 백번을 해도 부족하지만 친구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던 그녀.


그럼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P.S. 한국에서는 왜 물건을 못 보내는지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실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 관계상 다음 기회에 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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