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다음날에는 전날 급하게 주문했던 속커튼과 암막커튼이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설치하려니 커튼봉 길이가 맞지 않아 반품하고, 다시 다이소에서 맞는 제품을 사야 했다.
처음엔 커튼봉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지만, 속커튼과 암막커튼을 동시에 달려면 안쪽에 하나 더 필요한 건 당연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또다시 다이소에 들르면서,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우리는 너무 대충 넘기는 걸까, 아니면 굳이 예민해질 필요가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자잘한 부분에서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법.
직접 커튼을 설치해 보니 정말 그런 사소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속커튼과 암막커튼을 달고 집안 조명을 싹 끄고 보니,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저렴하게 샀지만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고, 속커튼까지 더해져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전 집에선 대형 블라인드를 사용해 암막커튼을 쓸 일이 없어 몰랐는데, 낮에도 밤에도 빛을 확실히 차단해 주니 잠잘 때도,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볼 때도 무척 유용했다.
낮에 벽에 빔을 쏴도 암막커튼 덕분에 크게 문제없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정도다.
오늘 글의 주제이기도 한 암막커튼은 햇빛 차단 외에도 이 집에서 가장 큰 역할이 있다.
바로 바깥의 슬픔을 잠시나마 외면하게 해 준다는 점. 창문 너머에는 장례식장이 있어, 매일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운구차에 고인을 옮기는 순간 들려오는 곡소리,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곳이 바로 장례식장이니 말이다. 그런 현장을 매일 지켜봐야 하니, 가끔은 암막커튼을 쳐서 빛과 함께 슬픔도 차단하고 싶어진다.
이사 온 지 어느덧 2주. 집 앞 장례식장을 지날 때마다, 문득 내 슬픔도 꺼내 보게 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장례식에 간 게 언제였더라?” 하고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이미 떠난 가족들이다. 2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비롯해, 함께했던 좋았던 기억도 있고 나빴던 기억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선 좋은 기억이 더 또렷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나를 보살펴주신 외할머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항상 묵묵히 챙겨주시던 친할아버지, 치매에 걸리셔도 “시집은 잘 가야 한다”라고 잊지 않고 말씀해 주시던 친할머니…
이미 떠난 분들이 여럿이지만, 나는 되도록 담담하려고 애쓴다.
다신 만날 수 없다는 현실 앞에, 살아계실 때 잘해 드리지 못한 기억만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죽음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어서, 그때마다 겪는 장례는 그 슬픔과 아쉬움이 더욱 크다. 힘든 일이 있던 날에는 “엄마가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하고, 그럴 때면 집 앞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내가 된다.
암막커튼을 치고 나면 대낮에도 집 안은 금세 어두워진다. 세상과 단절되어 온전히 내 슬픔만 느끼고 싶을 때, 빛과 함께 감정까지 가려 주는 기분이다.
정말 슬픈 글을 써야 할 때면, 어김없이 암막커튼을 치고 주황빛 스탠드를 켜 둔다.
여기에 슬픈 음악까지 더해지면 바로 그 감정에 깊이 잠길 수 있다.
오롯이 감정에 집중하고 싶은 날, 암막커튼은 바깥세상의 슬픔을 막아 주면서 동시에 내 안에 숨겨둔 슬픔을 열어 보여주는 존재다.
문득 창밖에 시선을 두면,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펼쳐진다.
무심코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서도 오래도록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서서히 피어오른다.
생전의 목소리와 웃음, 함께 보낸 시간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암막커튼을 치며 살짝 시선을 돌려보지만, 이미 피어난 슬픔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이 집에 살며 깨닫게 된 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나 후회마저도 결국 삶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며, 때론 그것을 직면해야만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장례식장 앞의 사람들과 내 슬픔이 겹쳐 보일 때, 애써 외면하기보다 그 슬픔을 조용히 마주하고, 다시금 살아가야 함을 되뇌게 된다.
이처럼 장례식장 앞에 산다는 건 매일 타인의 슬픔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내 슬픔도 깨끗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암막커튼을 치고 감춰 보려 해도, 또 다른 슬픔이 마음 한구석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