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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Jun 11. 2024

오렌지 껍질 벗기기

매일 아침 사과를 반조각 정도를 먹는 습관이 있다.

매장 오픈 준비를 마치고 첫 커피를 내려 사과 반조각과 함께 먹으면서 잠시 멍을 때리다 보면 서서히 신호가 오고, 기분 좋게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사과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애정하던 아침사과를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사과뿐만 아니라 과일을 전체적으로 다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과일에 눈을 돌리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불행인 건 사과값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값이 너무 많이 올랐다는 점이었다.


사과대신 이런저런 과일들에 눈을 돌리다가 이번엔 오렌지를 구매했다. 오렌지라고 해서 딱히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철을 맞아 더 달고 맛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사실 오렌지는 껍질을 벗기는 일이 귀찮아 자주 사 먹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누군가 껍질을 벗겨놓은 오렌지라면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껍질을 벗기는 일이 귀찮다고 해서 예쁘게 껍질째 슬라이스로 잘라놓고 먹는 건 싫다. 왠지 오렌지는 귤과 같은 동족(?)이니 귤처럼 껍질을 벗겨 먹어야 제맛처럼 느껴진달까. 예쁘게 슬라이스로 잘라져 있는 오렌지를 먹을 때면 진정한 오렌지맛을 느끼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손으로 오렌지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귤에 비해 껍질이 너무 두꺼워서 오로지 손의 힘으로만 껍질 벗기기를 시도했다가는 손톱이 아작 나기도 일쑤다. 그래서 가끔은 작은 과도의 힘을 빌려 살짝 칼집을 내고 벗길 때도 있지만, 진정한 오렌지가 주는 희열을 느끼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오렌지를 살살 누르고 달래 가며 손으로 벗겨보는 것을 추천한다. 


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손으로만 오렌지 껍질 벗기기를 결심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시간이다. 나는 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오렌지를 먹는데, 무엇보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 여유로운 시간대를 선택한다. 오렌지껍질을 손으로 벗기다가 갑자기 할 일이 생기면 낭패니까. 과즙으로 손이 매우 끈적하고 손톱이 노랗게 물든 데다가 손가락 끝에 엄청난 집중력을 쏟고 있는 와중에 컴퓨터를 켜야 한다던지, 빨래를 널어야 한다던지 하는 일이 생기면 매우 귀찮아진다. 그래도 껍질 벗기기를 위한 첫 흠집만 잘 내준다면 그다음은 일이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된다. 그 첫 흠집을 위해 두꺼운 오렌지의 껍질을 파고 들어가게 될 엄지손톱에게 미리 응원과 각오를 전하며...


여유로운 시간대를 선택해 손으로 오렌지껍질을 벗기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맛있게 먹을 차례!

손으로 껍질을 벗기느라 손은 다소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오렌지 하나를 분리해 입으로 넣는 순간의 기쁨은 다른 과일을 입에 넣었을 때와는 조금 다르다. 예쁘게 조각난 과일을 우아하게 포크로 찍어먹는 느낌과 비교한다면 손으로 벗긴 오렌지를 먹는 일은 과일이 아니라 김치를 죽 찢어서 날름 먹는 기분 같달까.

열심히 김치를 담그고 있는데, 김치맛이 궁금해져 배추 이파리 하나를 똑 떼어내 양념이 입가에 묻거나 옷에 떨어지지 않도록 손가락 두 개 정도로만 조심스레 집어 입 속으로 골인시켜야 하는 고난도의 미션처럼 말이다. 이름부터 너무나 외국스러운 오렌지를 먹으면서 김장이나 김치를 먹는 일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재미있기도 하다.


예쁘게 깎여있는 과일을 깔끔하게 포크로 찍어 먹는 것도 좋지만, 요즘의 나는 주로 과일을 그냥 우적우적 먹는다. 사과는 껍질째 4 등분해서 손으로 집어먹고, 가끔은 토마토도 자르지 않고 손에 들고 조금씩 베어 먹기도 하며 한여름에 냉장고 깊은 곳에서 한껏 차가워진 참외는 손으로 잡을 부분만 남겨두고 껍질을 깎아 역시 통째로 손에 쥔 채 선풍기 앞에서 먹는다. 

고기도 작게 자르는 것보다 큼지막하게 잘라서 먹어야 진가를 알 수 있듯이 나는 과일 역시 크게 한입씩 베어 물어야 과즙과 단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과일이 품은 계절의 기운과 특유의 사각거림 같은 과육의 질감을 느끼는 일, 마트의 매대에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과일들을 구경하며 큼지막하게 한입 베어 물어보는 상상을 하는 일들이 ‘내가 또 한 계절을 건강히 살아남아 맛있는 선물을 받는구나’ 하는 감상마저 느끼게 한다. 


여전히 비싸서 선뜻 구매하지 못하는 과일이 많지만, 껍질을 벗겨가며 남은 오렌지들을 다 먹고 나면 ‘이번엔 또 어떤 과일을 사서 맛볼까’ 고민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꽤나 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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