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간의 긴 무명생활을 견디고 결국엔 톱클래스의 배우가 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이런 말이 단골멘트로 나온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저는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꼭 배우들의 경우만 아니더라도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일해온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이 좋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걸 볼 때면 참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나도 꾸준함과 끈기는 꽤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끈기 있게 해 나가는 일이 반드시 계속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처음과는 달리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그만두고 뭐 할 건데? 카페 차리려고?”
그 당시 취미로 커피를 배우고 있었고, 평소에도 커피를 즐겨 마셨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내가 퇴사하면 당연히 카페를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퇴사를 하면 경력을 살려서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이 회사에서 해온 일들이 다른 회사에서 경력이 될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해온 일들이라고는 출근하자마자 사장님의 기분상태를 체크하는 일과 종일 앉아서 댓글을 달고 게시글을 쓰며 여론 같은 것들을 만들거나 고객인척 후기를 만들어내는 일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도무지 회사라는 조직을 다시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직원들을 언제든 교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도, 잘하면 본인이 잘난 거고 못하면 직원들이 무능력하다고 비난하는 이기심도. 하지만 그렇다고 카페를 차려볼 생각 또한 없었다. 그냥 무작정 그 속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계획 없이 퇴사를 했고 배우던 커피를 마저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리스타라는 새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모든 직업들이 그러하듯이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커피를 직업으로 갖게 되면서 더 이상 커피를 순수하게 좋아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난 그냥 다양한 로스터리를 찾아다니면서 같은 생두가 로스터에 따라 다른 맛과 향의 커피로 태어나는 것을 마주하는 일이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커피를 업으로 삼다 보니 진상손님들부터 시작해 세상에는 없었던 특이한 재료가 들어간 커피메뉴를 개발해 내야 하는 일, 커피 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자신의 프라이드를 앞세워 자존심대결을 하는 모습, 서비스직에게 주어지는 짜고 귀여운 급여까지 뭐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다. 처음 바리스타로 일하기 시작할 때 내가 이 직업을 해도 예전처럼 커피를 좋아할 수 있을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힘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커피였는데, 커피가 업이 되면 나는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괜히 나의 안식처를 없애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식처를 잃었다. 여전히 맛있는 커피를 찾아다니는 일은 좋지만, 어느 배우의 인터뷰처럼 여전히 커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느낌은 없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 커피라는 것은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말 그대로 즐길 수 있을 때 행복을 주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는 정말로 극명한 기호식품 같다. 단순히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도 신맛이 나지 않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과 신맛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깔끔한 핸드드립을 좋아하는 사람, 고소한 라테를 좋아하는 사람, 시럽이 들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 진한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사람 등등 많은 기호를 품고 있다. 커피를 즐기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 의해 커피가 다뤄지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다만 내가 힘든 부분은 커피 하는 사람들의 경우 ‘내 커피가 진짜 커피다’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핸드드립을 할 때도 칼리타 드리퍼는 초보자만 쓰는 하수용 드리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고, 물줄기를 떨어뜨릴 때 곡선이 어쩌고 직선이 어쩌고 하면서 본인이 하는 방법이 정석인 양 우쭐거리고 본인처럼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틀린 방식이라며 ‘커알못’이나 ‘커피 맛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기 일쑤다.
어쩌면 내가 유난히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을 보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내게 커피는 멋지지 않아 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직업으로서의 커피가 멋지지 않아 졌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직업으로서가 아닌 커피를 마시는 일 자체는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내린 커피를 좋아해 주시는 손님들의 말 한마디에 며칠간 버텨낼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커피는 정말 내게 ‘애증’이라는 단어를 가장 알맞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바리스타라는 직업의 수명을 끝내는 날이 온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커피 냄새가 나는 곳을 쫒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게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