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집을 사겠다고 마음먹고 이 아파트를 보러 온 날이 기억난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신혼부부로 시작해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다. 여느 아이가 있는 집답게 집안은 아이의 장난감과 물건들로 가득했고, 사방의 벽은 빈틈없이 낙서로 채워져 있었다. 아담한 부엌은 ㄷ자 형태로 아일랜드 식탁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집주인 여자는 본인이 신혼집을 인테리어 할 때 아일랜드 식탁이 너무 갖고 싶어서 좁은 주방에 무리해서 넣은 것이라고 했다. 큼지막한 양문형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까지 간신히 끼워 넣은 탓에 부엌을 통해 갈 수 있는 뒷베란다로 나가려면 배를 한껏 홀쭉하게 넣은 뒤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빠져나가야만 했다. 평수가 그리 넓지 않았던 오래된 소형아파트 1층은 그렇게 세 식구의 살림살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세 식구가 이사를 가고 도배와 화장실문 수리를 위해 다시 갔을 때, 텅 비어버린 집은 생각보다 넓었다.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세 식구의 살림살이가 빠져나가니 전에 보러 왔던 그 집이 맞는지 의심조차 들 정도였다. 투룸의 빌라에서 살던 내 살림살이들이 모두 들어와도 빈 공간이 한참 남을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집들엔 거실이라고 할만한 공간이 없어서 들여놓을 엄두도 못 냈던 소파는 이 아파트와 어울리는 컬러로 골라서 거실에 놓기로 마음먹고, 한때는 흰색이었을 누런 중고 냉장고는 냉큼 팔아버리고 양문형은 아니지만 좀 더 세련된 회색의 심플한 냉장고를 사야겠다고, 텅 비어있는 널찍한 공간을 보며 머릿속으로 나의 보금자리를 차근차근 디자인했다. 티비는 두지 말고 빔프로젝트를 사서 공간을 남겨야지, 창고로 사용하기 딱 알맞을 법한 작은방엔 어릴 때부터 로망이었던 책방으로 만들어야지, 같은 생각들을 하며 더 이상 세입자가 아닌 자가주택소유자로서 나만의 공간을 구상하는 일이 너무 설렜다.
그렇게 이사 후 3년이 지났다.
지금 오래된 소형아파트 1층의 우리 집은 맥시멀리스트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그냥 평범한 살림집이 되었다. 그전에 세 식구가 살았던 만큼 비좁아지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세 식구의 살림을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아 한때는 비우는 삶을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나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빈 공간은 그냥 두고 보기 힘들어하는 사람, 누가 보면 자질구레 하기도 또 누군가에겐 귀여워 보이는 소품들을 좋아하는 사람, 크고 비싼 걸 사는 것보다 저렴하고 작은 것들을 자주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 취향이 다양한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빈 곳을 채우는 걸 좋아하는 내 성향은 집안을 다소 정신없게 만들기도 하지만, 의외로 좋은 구석도 있다. 물리적인 공간을 메우는 일만큼이나 마음의 빈 곳, 지식의 빈 곳 같은 것도 메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박학다식의 척척박사는 못되지만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고 그 경험을 위해 무언가를 배우고 습득하는 것에 큰 고민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어서 내가 할 수 있을만한 일인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인지를 판단하고 쉽게 포기를 하거나 제외하는 경우는 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꾸준히 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가끔은 너저분하고 정신없는 집안살림이 눈에 들어와 날 잡아서 싹 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내 성향이 썩 마음에 든다. 갖추지 못한 빈 곳을 채우고, 작은 것이라도 배워나가다 보면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 계속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나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처럼 살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도 든다.
나의 여러 가지 서브잡 중 하나는 책을 만드는 일이다. 책을 만든다고 하니 엄청 거창한 편집디자이너 같지만, 실은 아는 작가님이 운영하는 글쓰기 강좌의 수강생들의 개인책자를 종종 의뢰받아 디자인하고 있다. 수강생들의 원고를 받아 읽어보고 그와 어울릴만한 표지 디자인을 구상하고, 내지의 폰트와 목차구성을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님의 제안으로 책 만드는 일을 가끔씩 하다 보니 난생처음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도 사용하게 되었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도 독학으로 조금씩 배워서 사용해오고 있었는데, 인디자인까지 다뤄야 한다니 처음에는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발등에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이 떨어지니까 또 어찌저찌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좀 기특하기도 하다. 그렇게 몇 권의 개인책자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제는 잔스킬들이 늘어서 작업시간도 꽤 빨라지고, 조금 더 예쁘게, 조금 더 가독성 좋게 만들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지금은 그저 책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꾸준히 책 만드는 기술을 연마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쓴 글로 내 책을 만드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빈 곳을 채워가며 살다 보니 하나 둘 새로운 꿈도 생겨나고, 어렸을 때 막연하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꿈들을 비슷하게나마 이루고 있는 기분도 든다. 어렸을 때 지나쳐온 꿈들 중 디자이너, 작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때는 집안 사정으로 배우지 못했거나 자신이 없어서 지나쳐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꿈들을 내가 찢어서 없애버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잘 접어서 서랍 깊은 곳에 꼭꼭 넣어두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펼쳐보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꿈들의 중심에서 당당하게 서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이렇게 작게나마 조금씩 이루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채우며 사는 삶의 긍정적인 면모랄까.
다만 비어 가는 것은 통장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