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독서모임에서 어떤 회원이 읽어온 책의 내용에는 아주 간단하게 해 볼 수 있는 자존감테스트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나라면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질문에 회원들의 절반이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면 본인은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고, 3분의 1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그 3분의 1의 인원에는 나도 속해 있었다(머쓱).
자신과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한 3분의 1의 인원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본인이 생각했을 때 자신의 직업도 나쁘지 않고, 외모 역시 아주 나쁘지 않다는 것 등을 언급하며 자신이 가진 장점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어떻게 대답했더라... 구체적인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내가 가진 장점을 떠올리기보다는 단점을 떠올리면서 ‘이 정도 단점이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회원들처럼 직업이 훌륭하지도 않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나름 꽤 성실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단점들을 잘 알고 있고,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나는 나를 조금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또 머쓱).
지금 내 삶의 모습이 마음에 쏙 들만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내 삶이 조금이나마 더 나아질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나의 마음가짐(?)을 본다면 나를 나와 결혼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설명할수록 머쓱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내가 나를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해서 그동안 많은 이성들의 사랑을 받아온 것은 아니다. 내 과거의 연애사는 사실 그리 화려하지도 뜨겁지도 않다. 이십 대 초반에는 소꿉장난 하듯 남자친구를 사귀었던 것 같고, 장난 같은 몇 번의 짧은 연애를 뒤로하고 사랑이라 이름 붙일 만한 연애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재도 기억나는 마지막 연애가 5년 전이었던가... 지난 나의 연애들은 어쩌면 무료할 만큼 평범했고, 그렇게 소란스럽거나 유난스럽지 않았음에도 누군가를 만나 뜨거운 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는 ‘네가 눈이 높아서 그런 거다’, ‘일단 아무나 만나보라’고 하는데 사실 그게 또 말처럼 쉽지 않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하는 연애인데 어떻게 아무나 만날 수가 있나.
그렇다고 내가 이성을 보는 기준이 연봉, 외모, 키 같은 철저한 물질적, 외적인 기준에만 입각하는 편은 아니다. 굳이 내가 원하는 이성의 기준을 단 한 가지만 말하자면 ‘대화가 즐거운 사람’이다.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지루하거나 괴롭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나.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차라리 연봉은 얼마, 키는 몇, 외모는 연예인 누구! 이렇게 구체적인 편이 더 낫겠다며 나무라기도 한다. 그렇게 애매한 기준이라면 주변에서 좋은 사람을 찾아 소개해주기도 어렵다면서.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눈이 높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누군가 나에게 ‘왜 애인이 없어요?’라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게요’하며 웃어넘기곤 하는데 그럴 때 친구들이 옆에 있으면 꼭 한 마디씩 거든다. ‘얘가 눈이 좀 높아서 그래요’라고. 앞뒤 없이 눈이 높아서 애인이 없다고 해버리면 내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지는데 말이다. 질문한 사람이 왠지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고 요모조모 뜯어보며 ‘이 여자가 남자 보는 눈이 높을 만큼 괜찮긴 하나?’하고 들여다볼 것만 같다. 예전엔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 내가 눈이 높은 게 아니라 나만의 기준이 있는 거라고!’ 하며 해명 아닌 해명을 하기 바빴지만, 이제 그마저도 지쳐서 그냥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렇게나 생각하렴. 호들갑 떨며 부정한다고 없던 애인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껄껄’.
나만의 기준이 있어 눈이 높은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지만, 다름 아닌 인생의 반려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인생의 반려자까지는 아니어도 내 삶의 일정 부분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데에 눈이 높으면 왜 안 되는 건지 의아하다. 많이 만나보고 사람을 보는 눈을 키우는 일은 내 나이에 이미 늦었고, 대신 진정한 내 사람을 찾는데에 좀 더 신중하겠다는데 말이다. 설령 이러다 결국엔 아무도 만나지 못한데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결정이 아닌 주변의 의견이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내 삶이 흘러가는 것보다는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내 인생을 끌어가는 편이 더 좋다.
몇 년 전 엄마의 사촌동생의 남편의 사촌형의 아들이라는 분을 소개받아 만난 적이 있다. 집안 어른들을 통해 소개를 받을 때는 만남 이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는 일이 생기고, 당사자들 간의 의견과는 상관없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에 나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는데, 어찌 됐든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가게 되었다. 상대방은 말수가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의 남자분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여느 평범한 소개팅과 다를 바 없었다. 남자분이 다음에 한번 더 만날 수 있겠냐고 제안하셔서 그러자고 답변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나로서는 두 눈으로 처음 목격한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 그 자체였다. 일단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께 전화가 와서는 어땠는지 물으셨고, 그냥 말수 없이 차분하신 것 같다는 말을 한 후 적당히 전화를 끊었는데, 다음날 남자분의 부모님 쪽에서 신혼집을 어디로 잡을 건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저 여느 소개팅처럼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으니 한번 더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다음번 만남이 있기 전까지 나는 거의 상견례를 마친 예비신부가 된 느낌의 황당무계한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른들을 통해 전해 듣는 이야기들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이러다가 정신 차려보면 결혼식장 문 앞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혼자만의 드라마들.. 결혼하고 났는데 엄청 불행하고, 나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아.. 안돼!!
결국 두 번째 만남을 끝으로 나는 정중하게 더 이상의 만남은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고,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았다. 그렇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진지하게 탐색할 기회는 영영 없어진 것이다.
이 일로 나는 섣불리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연애상담이나 인생고민을 털어놓는 지인들에게도 잘 들어줄지언정 절대 적극적인 훈수나 조언은 하지 말아야지...
혹여 확실한 행복의 보장이 기다리는 결정이라 하더라도 나는 내 인생의 방향키를 타인이 쥐는 것은 싫다. 반면 불을 보듯 뻔한 불행의 길이라고 주변에서 만류하더라도 내가 가고자 마음먹었다면 나는 나의 기준을 등대 삼아 겸허히 갈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나이 먹은 고집불통 아줌마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주변의 의견은 당연히 참고하되 최종 결정은 내가 하겠다는 말이다. 말하다 보니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이런 마음먹었으니 나만의 기준으로 이성을 보게 된 것인데, 때때로 누군가의 눈에는 쥐뿔도 가진 것 없이 눈만 높은 나이 든 여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뭐.
내 지인들이 이 글을 볼 확률도 낮거니와 본다 해도 나라고 생각할 확률은 더더욱 낮겠지만, 우연히 이 글을 읽고 나를 떠올린다면, ‘너는 눈이 높아서 연애를 못하는 거야’라는 말 뒤에 내가 가진 침묵의 의미와 나름의 이유를 늘어놓는 글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