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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Oct 23. 2024

고향 여행

차를 바꾸기 전에는 언제 어떻게 내 낡은 자동차가 길 위에 멈출지 몰라서 먼 곳을 갈 땐 항상 기차나 버스를 이용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갈 때도 미리 기차를 예매해야 했고, 시내버스로 역까지 갈 때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서 집을 나설 때를 정해야 하는 등 다소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몇 달 전 차를 바꾸고 나서는 직접 운전을 해서 갈 수 있으니 굳이 계획을 세우거나 예매를 하지 않고도 편한 시간에 집을 나설 수 있어서 그럴 때만큼은 차 바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 간소한 짐을 꾸리기 위해 이것저것 빼고, 부피를 줄이려고 고민하지 않아도 엄마아빠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것을 맘껏 챙길 수 있고, 또 엄마아빠가 챙겨주는 음식이나 주말농장의 수확물들도 마다하지 않고 가져올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편하달까.


부모님이 계시는 나의 본가는 충청북도의 작은 소도시다. 나의 유년시절 대부분의 기억을 가진 곳이기에 ‘고향’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실제 내가 태어난 곳은 그보다 더 작은 같은 충청북도의 군 단위 지역이었다. 본가에서는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인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한 이후 지금껏 다시 가본 적은 없어서 언제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다 얼마 전 여름, 역시 차를 몰고 본가를 다녀오던 날이었다. 차의 조수석과 뒷자리에는 엄마가 챙겨준 고추와 방울토마토 같은 주말농장 수확물을 야무지게 싣고 텅 빈 국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도로 표지판에 내가 태어난 지역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고개로 난 도로를 달려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니 오른쪽 창 너머로 소담스레 자리 잡은 진짜 나의 고향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고, 나는 그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여기서 우회전만 하면 내 어렸던 한 시절을 보낸 동네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핸들을 우측으로 틀었다. 그저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들러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 큰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진입을 하자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곳의 지리감은 그 당시 살았던 작은 연립에서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 뿐이었기에 일단 내비게이션에 연립의 이름을 입력해 봤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연립은 그때 그 이름 그대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넓지 않은 지역이라 차로 단 몇 분 만에 도착한 연립은 ‘원래 이렇게나 작은 곳이었나’싶을 정도로 아담했다. 나의 아빠와 엄마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1층의 창밖을 기웃거리는 순간, 맞은편 1층집에 살던 이웃언니와 창문을 통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까르르 웃던 기억이 아무런 저항 없이 떠올랐고, 뒤이어 어렴풋하고 희미한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았던 연립옆의 작은 놀이터는 이제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창고가 들어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이 커서 이렇게 어른이 되었고, 그 어른들은 이제 아이를 잘 낳지 않으니 자연스레 없어진 것일 테다. 연립을 나와 길가로 나오면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는 천변이 있다. 그곳엔 어린 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던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서 피를 흘리며 엉엉 울던 기억이 묻어 있었다. 엄마가 새로 신겨준 푸른빛 스타킹이 다 찢어지고,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엉엉 울면서도 발걸음은 꼬박꼬박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가면 스타킹이 찢어졌다고 엄마한테 혼나려나, 아니면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주려나, 걱정반 기대반으로 뚝뚝 눈물을 떨구며 가던 길. 천변가에서 무엇인지 모를 나물을 캐던 동네 할머니들이 ‘얘 너 왜 우니?’ 하며 말을 걸면 더 서럽게 울던 어린 여자애가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어른의 걸음으로도 집에서 15분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는 그게 먼 길인지도 모르고 가방에 교과서를 한가득 담아 꼭 십자가처럼 지고 다녔다. 엄마는 오늘 필요한 책만 가지고 다니면 되지 뭐 하러 죄다 들고 다니냐고 매일 아침 내 어깨에 가방을 메어주며 핀잔을 주었지만, 엄마를 닮아 괜한 곳에 고집이 있는 나는 꾸역꾸역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다. 어쩌면 내 키가 작은 이유는 그 때문 인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멘 어깨가 뻐근해져 올 때면 어느새 학교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남자 고등학교와 붙어있어서 등교를 할 때면 고등학교의 교문을 통과해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했다. 교문 앞에는 무시무시한 몽둥이를 들고,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군인처럼 서있는 학생주임 선생님이 계셨는데,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하며 고등학생 오빠들의 교복차림을 단속하다가도 조그마한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나타나면 세상 환하게 웃으셨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나만 보면 총총 걸어오셔서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웃어주셨다. 준비물을 사가지고 가던 날엔 ‘이건 어디에 쓰는 거니?’, ‘선생님이 사 오라고 했니?’ 하며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그런 날엔 어김없이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시고는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내가 사교적이고 낯가림이 없는 어린이었다면 우렁차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거나 아침마다 선생님한테 뽈뽈 걸어가 ‘안녕하세요!’라고 했겠지만, 어릴 적의 나는 사회의 때가 잔뜩 묻은 지금과는 다른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은 어린이었어서 교문을 지날 때마다 고등학생 오빠들 사이에 가만히 몸을 숨겨 교문을 통과하는 것을 도전하곤 했다. 물론 거무죽죽한 교복 사이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초등학생은 금방 표가 나 어김없이 선생님의 눈에 띄어 쓰담쓰담과 500원을 받곤 했지만. 


다시 그 학교의 교문 앞에서 학주선생님처럼 서보기도 하고, 그때의 초등학생처럼 교문을 향해 걸어보기도 하니 새록새록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 그 선생님은 지금쯤 어디에 계시려나, 퇴직하셨겠지, 그때의 나만했던 손주들과 노년을 보내고 계실까? 당연히 성함도 모르고,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선생님은 그때 그 수줍음 많던 초등학생을 기억하실까? 선생님, 저는 어느새 사회의 때가 묻어 때로는 넉살 좋게 먼저 어르신들께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농담도 하는 어른이 되었어요.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은 못됐지만, 다행히 어찌어찌 1인분의 몫은 해내며 살고 있습니다!

들릴 리도, 어딘가에 기록될 리도 없는 인사를 마음속으로 하며 소소한 고향여행을 마쳤던 그 여름날의 저녁은 가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지금까지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분명 원래 내 머릿속에 있던 기억들인데, 기억 속 장소를 다녀오고 나니 더욱 채도가 짙어진 느낌이랄까. 


기술도 매일 연마하면 더 좋아지듯이 기억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중한 기억일수록 자주 곱씹고, 기억 속 장소를 방문하고, 기억 속 사람들을 만나며 그때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는 것. 한 시절 감사했던 마음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않는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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