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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May 25. 2017

#40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세대의 상흔

  ‘인류 전체의 실패이구나.’

  몇 년 전 방문했던 작센 하우젠 수용소(Sachsenhausen Concentration Camp)의 풍경을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건물의 안과 밖에 남겨진 증거들과 증언들. 끔찍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됐다는 세세한 일지. 독일인도 유태인도 아니며 이 수용소와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던 나에게 이곳은 고등학교 세계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류가 실패한 현장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인류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사건이란다.”


  수용소를 방문하고 나는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에서 공부 중이던 미국인 친구를 만나 간단하게 밥을 먹고 여느 여행객처럼 개선문을 향했다. 그리고 개선문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나는 거대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마주하게 되었다. 메모리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양한 크기의 검은 직육면체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검은 물체 하나하나가 어쩐지 익명의 희생자 한명 한명의 홀로그램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시의 중심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검은 직육면체들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했다. 도시 한 가운데에 세워진 비의의 감정들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문뜩 한국의 광화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도시의 가장 중심의 가장 잘 보이는 곳을 골라 역사의 영웅을 동상으로 세웠다. 그런 도시에서 자란 나에겐 이 도시가 낯설었다. 그들의 수도 한 가운데에 자랑스러운 영웅이 아니라 비극적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는 것. 당시 독일 근대사를 공부하고 있던 나의 친구에게 물었다. “매일같이 여기를 지나는 독일인들은 이 메모리얼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친구는 잠깐 그 질문의 의미를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아마 이 사람들은 우리가 세계사 책에서 배우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할 순 없겠지.”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 이후의 세대였지만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는 그들에게 바로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의 일이었다. 부모 세대가 벌인 끔찍한 폭력에 대한 죄의식은 그대로 그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이건 인간 보편의 악이며, 인류 실패의 증거라고, 그렇게 거시적인 시각으로 정의를 내리기엔 역사는 그들에게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식민지 시대 이후 피식민지인들이 겪는 제국주의적 경험을 ‘후기식민주의’라고 부른다면 폭력의 주체이자 가해자의 다음 세대가 겪는 죄의식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역사는 늘 그 다음 세대에게도 복잡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더 리더>는 전쟁 이후의 세대의 반응들을 프레임에 담아낸다. 영화 속에서 세대의 감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이클의 법대 동기였던 디터가 자신의 교수 앞에 던진 날카로운 질문이 그중 하나이다.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고는 어떻게 자살하지 않을 수 있어요? "
"The question is, how could you let this happen, and better, why didn’t you kill yourself when you found out?"


  마이클처럼 전쟁 세대와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에게 피고인들은 이해할 수도 이해할 여지도 없는 대량 학살자들이었다. 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정의의 실현을 외치는 디터이지만 그의 날이 선 외침에도 세대의 상흔이 느껴진다. 자신의 부모님도 지금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도 사실은 모두 범죄를 묵인한 죄인이었다는 안타까움. 디터가 법대생으로서 이성적으로 재판을 바라보지 못하고 격정적으로 분노하는 것도 이런 상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리더>가 영화 전면에 제시한 것은 디터의 감정이 아닌 마이클의 감정이다. 영화는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한 두 세대의 사랑 이야기를 택하면서 전쟁 이후 세대의 복잡한 감정을 여지없이 서술한다. 영화는 초반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마이클과 한나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들의 사랑은 섹스로 묘사되지만 그보다 더 큰 방점은 마이클이 한나에게 늘 책을 읽어주는 데 있다. 일리어스부터 연애소설까지,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에 울고 웃었다. 책을 읽어주고 그것을 들었던 시간은 그들이 같은 감정으로 ‘공감’하는 순간들이었다. 책은 마이클이 한나의 감정들을 이해하도록 하는 매개체였다.


영화 <더 리더> 스틸컷


  마이클은 재판이 시작되면서 그의 세대와 분리된다. 기숙사에서 파티를 하는 아이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재판을 보고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늘 그의 동기들과 분리된다. 자신의 세대와 같은 정서적 공간에 있지 못하고 홀로 갈등하는 모습은 그녀를 이해는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던 그의 심리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다는 죄보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더 부끄러웠던 사람. 찰스 디킨스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으며 연민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면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몰랐던 그의 연인. 한나는 죗값을 받아야 했고 마이클은 그녀를 위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마이클은 수십 년간 그녀를 보러 가지도 편지 한 통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수십 년 후에도 한나를 지워버릴 수 없었던 마이클은 그녀에게 다시 책을 읽어주며, 그녀가 도덕과 윤리에 대해 깨닫기를 희망한다.

영화 <더 리더> 스틸컷


  마이클과 한나는 비록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지만 마이클이 겪은 정서적 경험은 전쟁 이후 세대 모두에게 유효하다. 사랑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던 자신들의 부모와 선생과 가족들. 전쟁 이후의 세대가 이 비극적 역사를 단순히 역사책에 기록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한나가 스스로 단두대에 오르고 마이클은 그녀가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대신하여 피해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뜻대로 유산을 한나 슈미츠의 이름으로 유대인 단체에 기부한다. 전쟁의 세대와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분리될 수 없었던 전쟁 이후의 세대는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봉합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딸 줄리아를 한나의 묘지로 데려간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한나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꺼낸다. 역사는 그렇게 그 다음 세대에게 전해진다. 한나의 묘지 앞에 서 있는 줄리아의 모습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지나던 베를린의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줄리아는 아버지의 역사 앞에서 답을 얻을 수 없기에 가슴 아픈 질문들을 물어야 할 것이다. 베를린의 사람들이 매일 홀로코스트의 메모리얼을 마주하며 일상처럼 민족의 역사에 질문을 던져야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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