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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문 Aug 21. 2020

<미스 리틀 선샤인>

[36주] 나는 불행하다

나는 불행하다. 어젯밤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불행했다. 임신 9개월, 말기인 오늘 왜 그렇게 불행하고 우울할까. 평범한 여름 장마 속의 일요일, 집에만 있기 싫어 집 근처 사이폰 커피가 맛있다는 카페를 걸어갔고, 빵집에서 생도넛을 샀고, 멸치국수를 먹고 집에 와 티브이를 보고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신랑과 함께 일상적인 주말을 보냈지만,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하루였다. 합쳐서 1시간 여 되는 걷는 산책시간으로 걸을 때마다 허리와 배(와이 존)의 통증이 있었고 목에는 신물감이 여전히 있었지만 그건 일상적인 만삭 임신부의 고질 증상이었다.


호르몬의 변화, 그것이 침대에 누운 나를 그토록 불행하게 했을까. 발단은 이렇다.

목이 또 시큰하고(임신 역류성 식도염 증상), 동시에 배고픔을 느껴 침대에 누워 거실에서 영화를 보던 신랑에게 배고프다고 하니, 다 늦었는데 그냥 자라고 하는 신랑에게 울컥 서운함을 느꼈다. 서운함이 화로 치밀하게 했고 그를 다시 치밀게 말을 내뱉었고, 그 말을 하면서도 그 화가 끝없이 흐르는 눈물과 서러움으로 그토록 스스로를 처절하게 복받치게 했고, 현관을 박차고 나가게 하고 집 앞 공터에서 한참을 엉엉 울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게 한 것이 호르몬이었을까.


 그 삼십여 분 안 난 결혼을 후회했고, 임신한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했고, 영원히 영원히 이 임신이 이어질 거 같은 강박적인 불행함에 소리 내 엉엉 울었다.


행복은 조건은 무엇일까, 가족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침대에 누워 '임신 말기 우울증'에 대해 검색하며 생각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후버 가족이 막내딸 올리브를 어린이 미인대회인 '미스 리틀 선샤인'에 출전시키기 위해 고물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 레돈도 비치로 향하는 1박 2일간의 여정을 로드 무비로 그려내고 있다.


고장 난 버스를 타고 가는 가족의 이상하고 고장 난 여행.


대학 강사인 가장 리처드(그렉 키니어)는 성공에 대한 지론을 펼치는 강의를 하지만 본인은 파산 직전이다.  할아버지(앨런 아킨)는 마약을 하다 양로원에서 쫓겨나서 집에 얹혀있다. 전투 조종사가 되고 싶지만 아들 드웨인(폴 다노)은 색맹이다. 이 콩가루 집안에 얹혀살게 된 외삼촌 프랭크(스티브 카렐)는 게이 애인한테 차인 후에 자살을 기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방금 퇴원했다. 이런 모든 막장 같은 상황에 엄마 쉐릴(토니 콜레트)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7살짜리 막내딸 올리브(애비게일 브레슬린)는 또래 아이보다 통통한(?) 몸매지만 유난히 미인대회에 집착하며 분주하다.


누구보다 미인대회 우승을 꿈꾸며 아빠가 말하는 승자가 되고 싶은 올리브는 대회에 도착해 알게 된다. 성인 여성들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획일화된 미의 기준으로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미인대회의 실상을. 어린아이가 성인과 마찬가지로 진한 화장과 부풀린 사자머리와 수영복 심사와 거짓 미소를 만들어야 하는 그 실상을. 그리고 피날레로 무대를 찢어버린(?) 할아버지와 올리브의 회심의 망작 '성인 스트립댄스'는 왠지 통쾌하기까지 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결코 융화될 수 없을 것 같던 결점 투성이 가족이 융화되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징글징글한 '가족 같은'이라는 굴레 속에서 그 존재와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를 마친 올리브와의 이 대사가 다시 나를 깨웠다.


"전 패배자가 되기 싫어요."
 "그럴 리 없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해? 패배자라는 건 패배할까 무서워서 시도도 안 하는 사람이란다. 넌 시도하잖아. 안 그래?
그럼 패배자가 아니야. 내일 신날 거야 그치?"  

그렇게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벤치에 앉아 엉엉 울고 보니 바깥세상은 저녁 9시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아파트마다 제각각의 불빛들이 켜져 있었고, 티브이가 켜있는 집, 부엌과 거실을 오가는 그림자들, 저녁의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그 옆의 강아지들, 왠지는 모르지만 굳이 분리수거장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쭈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40대 가장 몇 명들.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스스로가 진정되면서 이 평범한 현실 속에서 지금의 이 울음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을까 라는 반문까지 들었다. 다리가 부어서 아프고 배가 고프다는데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며 대답이 없었던 신랑에게 화가 난 건지, 배가 점점 불러오며 지난주부터는 걸을 때마다 와이 존이 너무 아파 몇 걸음 떼면 쉬어야 하는 뒤뚱대는 스스로에게 화가 난 건지, 내가 왜 결혼을 했을까 왜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어서 이렇게 힘들다고 생각된 건지 등의 생각들이 뒤죽박죽 혼재되었다.


그렇게 내가 울고 있을 동안에도 이 아파트 단지의 평범해 보이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가정을 이뤄서 자기들만의 삶을 이루고 있고, 견디고 있고, 당당하게 꾸리고 있었다. 나도 그중에 하나이며,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지만 이렇게 힘들 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영원한 행복이 지속될 거란 믿음 자체가 정신과 병동 직행 버스가 아닐까?


현관 비밀번호를 따릭 누르고 돌아와 거실에서 아직까지 충격으로 얼빠져 있는 신랑을 뒤로 하고 침대에 다시 모로 누웠다. 신랑이 침대 옆에 앉아 왜 그래~하며 나를 품에 안고 달래준다. 나는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자동적으로 입술이 삐죽거리면서 폭 안기면서 "정말 미워"라는 말을 반복했다.


내가 왠지 모를 호르몬과 슬픔에 빠져 쏟아낸 막말을 그는 담담하게 뒤로 하고  아직 어리기만 한 임신부와 신혼인 아내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도 다시 '가족'으로 돌아온다. 아, 가족이란 이런 거지. 아무리 <미스 리틀 선샤인> 같이 요상하고 징글징글한 가족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지. 그리고 그 요상한 가족은 내가 그 주인공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패배자가 아니라고. 너도 아니라고 나에게 올리브에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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