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절대 권력의 왕정국가
3시 30분 출발 Casablanca행 급행열차는 이름만 급행이다. 웬만한 곳엔 다 서고 전혀 급행답지 않은 느림보 열차다. 2등석은 지정 좌석이 없다기에 지정 좌석이 있는 일등석 표를 샀는데 유럽식의 6인용compartment 객실이다.
차창으로 보는 모로코는 사막이 아니라 마치 초원의 나라 같다. 어느 도시인지 모르지만 멀리서 본 풍경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이라 해도 믿겠다. 제대로 된 사막을 보려면 사하라쪽으로 가야 한다. 4시간이 넘게 말없이 현지인들과 마주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네. 그래도 중간에 탄 컴퓨터 엔지니어라는 한 젊은 여성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 마지막 30여분간은 심심치 않았지만.
카사블랑카에 가까워 올수록 주변의 집들은 하얀색 일색이다. 카사블랑카(하얀 집)라는 지명 때문에 흰색을 칠한 건가? 아니면 흰색 집이 많아서 카사블랑카라고 부르는 건가? 카사블랑카는 역사도시 페스나 마라케시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대서양에 연한 현대적 도시인데, 400만 인구를 품은 모로코 경제와 상업의 중심지이다. 무역항구로서의 카사블랑카의 역사는 꽤 오래 되지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 1912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근대적 식민도시로 건설되었다.
'카사블랑카'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한편의 영화 덕이 크다. 1942년도 제작, 함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거만이 주연한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2차대전 중 카사블랑카를 무대로 벌어지는유명한 멜로 영화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카사블랑카를 찾기도 한단다. 실은 영화가 이곳에서 한 컷도 촬영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마라케시로 가기 전 하루 밤 경유하면서 카사블랑카의 랜드마크
하산 2세 대 모스크를 구경하기 위하여.
역 근처의 호텔은 대부분 그렇지만 싸구려 호텔이 많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도 방은 크지만 시설은 영 별로다.
밤새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잠이 깨이곤 했다. 아침에 서둘러 하산 2세 모스크를 가기 위해 택시를 잡는데
택시기사 마다 부르는 값이 널을 뛴다. 100디럼을 부르는가 하면 20디럼을 부르는 기사도 있고. 우리같은 동양 노친네들이 호구로 보이는 건가? 이럴 때는 그래도 유투브에서 익힌 몇마디 아랍어와 숫자가 효력을 발휘한다. 아랍어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이다. 특히 동양인에게는.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아랍어 문어체는 그런데로 배울 만 하다. 문어체는 코란을 읽어야하기 때문에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구어체는 사정이 다르다. 지역마다 각양각색, 아랍인들조차 서로 의사가 안 통할 정도로 다르다. 천년 이상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전해온 사투리(구어체))를 어떻게 쉽게 알아 듣겠는가? 모로코 아랍어를 Darija라 하는데, 역시 보통 아랍어와는 상당히 틀리다. 그래도 요즈음 유투브를 활용하면 간단한 인사말과 숫자는 쉽게 익힐 수 있다.
택시에서 보는 해안가 도로는 참 멋있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고급스러운 하얀색의 주택가들이 즐비하다.
프랑스 풍의 거리에는 트램이 여유롭게 다니고, 곳곳에 심어진 야자수 나무는 이국적 정취를 더하고 있다. 어제의 페스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에 온 느낌이다.
해안가에 우뚝 선 카사블랑카의 랜드마크 하산 2세 모스크와 미나렛은 멀리서 봐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성 같은 것이, 우리도 사실 이 한장의 사진에 반해 카사블랑카에 들린 셈이니까. 실제로 이 모스크는 '신의 왕좌가 물위에 떠 있다'라는 코란의 구절에 근거하여 전 국왕 하산2세가 그의 60세 생일을 기념해 바다를 매립하고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지은 것이란다.
불과 30여 년 전(1993년)에 지어진 현대식 대 모스크는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난데 신도 2만5천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홀과 2만6천평에 달하는 넓은 광장을 자랑하고 있다.
광장에 내려 바깥구경만 해도 엄청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와 모스크 안으로 막 들어가지 않는가? 알고보니 이 모스크는 비무슬림도 들어 갈 수 있단다. 비싼 입장료만 내면. 120디럼 입장료가 부담스러웠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들어 가볼 수야 없지!
모스크 내부로 들어 가니 역시 입이 짝 벌어진다. 모로코산 최고의 자재들만을 사용했다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실내는 수많은 장인들이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깎아 만든, 하나 하나가 예술작품 같다.
집채만한 화강석 기둥과 반짝 반짝 빛나는 대리석 바닥, 벽면을 장식하는 화려한 plaster 조각과 더 높은 목재 천정,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뚤려 있는 유리창,그리고 천정에 매달린 베니스산 상들리에.홀이 얼마나 넓은지 그 많던 관광객들은 사방에서 흩어져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아름답고 대단하다.
국왕의 친구이자 모로코에 오래 산 프랑스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모스크는 유명한 이슬람 모스크들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는데 중세시대도 아닌 현재에 가난한 이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엄청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재원은? 모스크를 마냥 놀란 눈으로 구경하면서도 내내 이런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해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온다. 모로코는 마그레브 4개국 중에서 왕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유일한 절대 왕정국가이다. 왕이 결심하고 명령하면 그것이 법이다. 시대착오적이라고? 짐이 백성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를 지어 바다를 보면서 예배할 수 있는 은총을 배풀려는데 누가 말려?
그러면 엄청난 건축비는? 백년대계의 국가적 대역사인데 십시일반 국민들이 헌금하면 되지 않겠어? 그리하여 그는 국민들에게 7억5천만불에 달하는 건축비를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할당한다. 최소 1인당 5디럼 이상,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아직도 이처럼 대단한 왕정국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스럽다.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관광객들을 상대로 삐기 노릇을 하는 가난한 이 나라에 도시마다 호화로운 왕궁을 두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왕국이 있다니,지금 21세기 맞아? 글세, 멀지 않은 곳에 김씨 왕조도 있는데, 뭘~!
어쨋던 하산 2세는 그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남겼다. 카사블랑카가 아무리 싫어도 꼭 와야될 이유인 하산 2세 모스크에다가. 나처럼 불경스러운 외국인은 빨리 카사블랑카를 떠나는 것이 좋겠지? 호텔로 돌아와 12시 마라케시행 CTM버스를 타기 위해 택시를 잡는데 매번 택시기사와 흥정하는 일이 정말 짜증스럽다. 모로코를 떠날 때까지 반복되는 택시기사와의 다툼은 내가 모로코에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이유 1순위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