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원주민 지배자 베르베르인들
버스를 타고 마라케시를 가는 길의 풍경은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초원보다는 황량한 대지 위에 듬성듬성 보이는 마을들. 아틀라스산맥에 가까운 남쪽 지역으로 내려갈수록 풍경은 더욱 거칠어지고 땅도 집도 점차 붉은색으로 변한다. 마침내 마라케시 시내로 접어들자 온통 세상이 황토색이다. 마라케시의 색갈이라는 적황토색(ochre-red), 온화하고 편안한 색갈이다. 때로는 황토색 담벼락이 화사한 붉은 꽃들과 초록이 어울려 환상적이며 강렬하기 조차하다
모로코의 북쪽이 비옥한 지중해 문화권이라면 남쪽은 아틀라스산맥과 사하라에 가까워 삭막하고 보다 아프리카적이다. 아틀라스지역에서 나는 붉은색 흙이 마라케시의 적황토 색깔을 만들어 냈다. 마라케시는 베르베르인의 도시이자 아프리카적 도시이다. 베르베르인은 원래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과 사하라 사막에 살던 모로코의 원주민이다. 이슬람의 북아프리카 정복 이후 비록 아랍화되긴 했지만 지금도 모로코 인구의 1/3이
베르베르족이고 그들은 따로 베르베르 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고, 베르베르족 연합체인 알모라비드는 세력을 키워 모로코를 정복하고 1062년에 마라케시를 수도로 삼는다. 그 뒤를 이은 알모하드왕조는 마그레브(나일강 서쪽지역, 지금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를 통일하고 세비야까지 지배하는 최고의 황금기(1130~1230)를 누린다. 그러니 베르베르 어는 마그레브(Maghreb)의 문화적 바탕이자 그들의 자존심이다.
모로코의 건축과 장식은 아랍의 옷을 입었지만 기질과 생활 습관은 베르베르적이다. 북 모로코와는 완연이 다른 아프리카다운 도시 마라케시. 모로코(Morocco)라는 국명도 마라케시(Marrakesh)에서 나왔다. 고려가 코리아가 되듯이. 마라케시야 말로 진짜 모로코이다. 마라케시를 보지 않고서 모로코를 봤다고 할 수 없겠지? 2박 3일의 여행이 잔뜩 기대되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페스에서의 낭패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 바로 호텔로 전화하니 직원 왈, 택시가 호텔까지 'no problem'이란다. 택시정차장에서 누군가 유창한 영어로 시내까지 100 디람을 외친다. 공항이나 터미널은 시내에서 통상 멀리 위치해 있으니까 흥정하기도 귀찮아 타는데 알고 보니 그 사내는 삐끼이고 기사는 따로 있다. 택시가 우리를 내려 준 곳은 바로 코 앞의 5분 거리. 아차 하는 순간에 또 당했다. 현지인 같으면 20디럼도 안 되는 거리이다. 화가 나서 기사에게 막 항의한 끝에 50 드럼에 합의하고 내리는데 이번에도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 호텔은 안 보인다.
주소를 들고 머뭇거리는 사이 웬 10대 둘이 생글거리며 나타나 자기들이 길을 안내해 주겠단다. 200~300미터 정도 골목길을 도니 숙소가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돈을 내란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화가 나 나쁜 놈들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 푼도 못주겠다고 했더니, 아이 둘이 어디서 배웠는지 미국식 쌍욕을 하고 달아난다.
열을 식히고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이라도 줄 것을, 누군가 모로코에서 삐끼들을 '여행의 양념 '으로 생각하고 열받지 말라고 했지. 이런 문화도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어쩔 수 없는 한 방편이라고 이해해 주면 되는데. 나이가 인격이 아닐진대, 이런 버럭과 아집은 나 만의 노인병인가? 어쨌든 기분이 상해 숙소직원 Issam에게 조금 전 택시 바가지 이야기를 했더니, 여기 택시기사들은 외국인에게 보통 2~3배 부른다나!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바가지를 쓰는 사람이 바보(?)라는 뜻인가?
숙소는 부킹닷컴에서 본 대로 중정도 깔끔하고 방도 깨끗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와이파이가 고장이란다. 우리는 로밍을 해오지 않아 그나마 숙소의 와이파이가 필요한데. 숙소에 짐을 푸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다. 기분도 그렇고 밖에 나가 모로코음식을 먹고 싶지 않아, 조금 멀긴 하지만 택시로 카루프를 찾아 나선다. 와인도 사고 먹거리를 사서 제법 푸짐하게 저녁상을 차렸는데, 이런! 아무리 가방을 뒤져봐도 수저가 안 보인다. 우리는 간이 수저를 늘 챙겨 다니는데 아마 어디서 빠뜨리고 왔나 보다. 난감하다. 우리는 난생처음 손과 주머니칼로 밥을 먹는 희한한 경험까지 한다.
오늘은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인가 보다. 시쳇말로 뚜껑이 열리기 일보 직전. 겨우 와인으로 화를 꾹 달래긴 했지만 우리의 마라케시여행은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