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페스의 놀라운 매력
밤새 천둥번개가 치더니 아침에 눈을 뜨니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뜻밖에도 아프리카 땅인 이곳이 스페인보다 훨씬 기온이 낮다. 아침저녁에는 겉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일교차도 심하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후 우리는 다시 메디나 구경에 나선다. 일차 목적지는 가죽염색공장(tannery), 메디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데 메디나의 상징이자 간판이다.
메디나의 가죽염색공장은 워낙 유명해서 길마다 안내표시가 잘 되어 있어 굳이 안내자가 필요 없다. 길표시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골목 모퉁이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청년 하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를 선행하여 앞서 간다. 안내가 필요 없다고 거절해도 묵묵부담, 가죽염색공장 입구까지 우리를 강제로(?) 안내하는데 냄새가 진동한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냄새, 바로 페스의 냄새이다. 페스의 가죽염색공장이 비둘기 똥, 소변, 생선기름, 동물지방, 유황 등을 섞어 염색한다는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는데, 거짓말도 아닌 것 같다.
염색공장을 보기 위해선 1,2층의 가죽제품 매장을 일단 거쳐야 한다. 손님이라고는 우리뿐인데 매장 직원의 과장된 안내가 무척 부담스럽다. 우리는 여행 중 여간해선 물건을 잘 안 사는 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본 페스의 가죽제품들은 딱이 사고 싶은 물건도 아니다.
매장 직원은 과잉친절을 베풀며 우리를 공장이 보이는 옥상으로 안내한다. 비가 오기도 하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염색공장은 텅텅 비어 있다. 사진 몇 장 찍고 등 뒤의 간지러운 직원의 눈살을 무시한 채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아까 우리를 막무가내기로 안내하던 청년이 손을 벌리고 있다. 메디나의 이런 삐끼들 이야기 참 유명도 하더라. 전혀 안주기도 그렇고 해서 10 디람을 주었더니 아주 불만스럽게 얼굴을 일거리 뜨린다. 이런 억지 친절(?)을 파는 것을 전혀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듯하고, 그들 삶의 일상으로 비치게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모로코인들의 어두운 모습이다.
가죽염색공장을 나와 Kairaouine모스크를 찾아가다가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고 만다. 일단 사람들이 보이는 큰 골목까지 겨우 나왔더니, 그곳에는 뜻밖에도 우리가 어제 보지 못하던 새로운 페스의 골목풍경이 나타난다. 한결 세련되고 우아하고 예스러운 페스가.
남자들의 바느질공방도, 화려한 장신구 상점도, 나귀를 끄는 나귀꾼도, 좁은 길에 짐을 내리고 잠시 주차(?)해 있는 당나귀도,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페스의 정취이다. 페스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삶의 현장임을 실감한다.
잠시 기웃거려 보는 Nejjarine목공예품 박물관 마당의 커다란 중세식 저울 위에 남녀 둘이 장난스럽게 무게를 달고 있다.
겨우 찾은 Kairaouine모스크와 대학은 예상대로 무슬림이 아니면 입장할 수 없다. 아쉽지만 바깥에서 잠시 들여다볼 수밖에.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며 또 다른 미로 같은 골목으로 잘못 들어서고 만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혀 다른 페스가 나온다. 와!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골목엔 아름답고 화려한 무데하르 건물들이 줄을 잇는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 진정한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우리는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지만 애를 쓸수록 더욱 깊이 들어가고 만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색다른 페스를 또 만난다. 대부분 종교시설들 같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겉에서만 보아도 다들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물며 내부는 어떠할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감출 때 우리의 상상력은 춤을 추기 시작하나 보다. 이때만큼은 나도 무슬림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하다.
조금 전 기웃거렸던 Kairouine 모스크의 일부 건물 같기도 하고 무슨 건물인지 알 수도 없다. 굳이 알 필요도 없지 않는가? 그곳이 모스크이든, 마드라사이든 아니면 어느 왕후장상의 저택이든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스페인에서 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데하르 건축물들을 실컷 보고 감탄하고 폰카에 담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왕 보압딜이 이곳 페스로 망명해 살다가 죽은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이곳이 그라나다와 뭐가 다르랴? 다만 왕좌만 없었을 뿐이지.
우리는 알라신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돌아다닐 수 없다는 페스의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가이드 없이 이틀 동안 용감히(?)도 돌아다녔다. 모두를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페스의 색깔과 냄새를 오감으로 느끼고 즐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페스를 보는 여행자의 시선은 극과 극이다.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과 엄청나게 욕하는 사람. 한국의 건축가 승효상은 천년의 도시 페스는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우물을 중심으로 10여 가구씩 이웃을 이루면서, 가장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도시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페스는 천년은 더 살아남을 도시라고 말한다.
겨우 30년 된 집들까지 몽탕 헐고 편리하고 돈이 되는 초고층 아파트만을 선호하는 아파트공화국 사람들에게 페스는 어떤 의미일까? 푸른 문(Blue gate)을 나서며 나는 승효상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천년 후에도 후손들이 우리가 본 페스를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로코인들의 더 없는 자긍심이자 인류사의 위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메디나를 나와 우리가 찾은 곳은 성문 밖의 넓고 아름다운 아랍식 Bou Jeloud 정원. 19세기에 술탄 Moulay Hassan이 대중에게 공개한 왕실 정원이라고 한다. 울창한 숲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과 분수가 어우러지는 이 정원의 아우라는 낙원을 걷는 기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도 야자수나무와 오렌지나무는 낙원에 없으면 안 될 필수 수목인가 보다.
정원이야 어디인들 아름답지 않겠나 마는, 우리가 거쳐 온 세비야의 알카사르궁 정원이나, 코르도바의 알카사르 정원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일견 훨씬 더 자연스럽고 아랍식 정취마저 물씬 풍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누리는 더 할 수 없는 행운은 바로 이런 대단한 정원을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번 여행이 주는 특별 보너스랄까?
정원을 지나 왕궁을 찾아 나서는데 우연히 만난 두 노인이 친절하게도 지름길을 안내한다. 이곳은 성밖의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 같다. 골목은 지저분하고 열악해 보이지만 공동 급수대 위에 그려진 우스꽝스러운 벽화와 푸른색 골목길은 이 동네 주민들의 마음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는 여유를 보여주는 것 만 같다.
바로 그 골목길을 나와 오래된 상가거리를 지나자 곧 왕궁이 보인다. 근엄한 근위병과 황금색 출입문이 방금 지나온 골목길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왕궁은 엄청 넓고 담장도 한참 높다. 그 안에 어떤 아방궁이 감추어져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왕이 살지도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서둘러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향한다. 고작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페스를 소감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페스에서 추억은 우리에게 꽤나 오랫동안 남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