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
자니콜로(Gianicolo) 언덕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천천히, 쉬엄쉬엄’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외친다. 로마 첫날인 어제 이팔청춘도 아닌 우리가 너무 무리했다. 나이 생각을 했어야지. 온몸이 욱신거리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머리도 띵하다. 그래도 샤워를 하고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니 다시 힘이 나는 것 같다. 오늘은 자니콜로(야니쿨룸) 언덕으로 가서 좀 쉬자. 지도상으로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테르미니역 앞에서 40번 버스를 탄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뿌리지만 40번 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만원이다. 알고 보니 이 버스는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 나보나 광장 등 주요 관광명소에만 서고 곧장 베드로 성당 입구까지 가는 준 급행버스다. 어제 이 버스를 탓더라면 고생을 덜 했을 텐데.
바로 옆의 승객에게 ‘자니콜로 언덕을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서 있는 승객 중 한 사람이 내 유창한(?) 이탈리아어가 통했는지 열심히 설명해 준다. 그런데 하나도 못 알아듣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종점까지 와 버린다. 내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성 베드로 성당이 보이고 바로 근처에 천사의 성과 테베레(Tevere) 강이 있다. 오전인데도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 앞길은 나들이 인파로 가득하다. 로마 병정 차림의 사람들도 눈에 띄고 테베레강 쪽 언저리에는 각종 기념품과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무슨 축제일 같은 기분이다. 오늘이 메이데이라서 그러나.
우리는 인파에 휩쓸려 천사의 성 주변과 다리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천사의 성을 올려다보니 불현듯 성 위에서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의 카바라도시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이 들리는 것 같고 성벽 밑으로 뛰어내리는 토스카의 모습도 눈에 아른거린다. 천사의 성 주위를 한참을 노닐다가 한 정거장을 걸어 내려와 자니콜로 언덕 행 870번 버스를 탄다. 10여 분을 꼬불꼬불 산언덕으로 올라가다가 여기쯤인가 하고 내렸더니 또 잘못 내렸다. 투덜거리며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이 길이 과히 환상적이다. 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아름다운 새소리, 바람 소리가 귀를 간지런다. 널따란 길 양옆으로 하늘을 가리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숲을 따라 걷는 길은 호젓하고 너무나 상쾌하다. 아내와 함께 걷기에 분위기 만점인데 로마에 이런 멋진 데이터 코스가 있다니 너무 뜻밖이다
10분쯤 걸어 올라가니 우측으로 가리발디 장군의 평생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그의 아내 아니타 가리발디의 동상이 서 있다(그 밑에 그녀의 유해가 묻혀있다). 아이를 안고 전투에 임하는 결연한 모습이 그녀가 절세의 여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금 더 오르니 넓은 광장이 나오고 광장 한가운데에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더 높게 우뚝 서 있다. 그의 시선은 부드럽게 아니타 쪽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가 바로 자니콜로(Gianicolo) 언덕이다. 광장 둘레에는 소나무가 가리발디의 호위병처럼 일렬로 도열해 있고 그 아래 로마 시내가 눈앞에 확 들어온다.
광장 주변에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의 흉상이 줄지어 세워져 있고 언덕 한쪽 기다란 담벼락에는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을 기념하는 글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자니콜로 언덕은 로마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의 산 교육장이다. 근대사에서 이탈리아의 통일운동만큼 드라마틱한 역사가 또 있을까? 이탈리아는 로마제국 멸망 이후 1천 년 이상을 사분오열 모래알처럼 찢어진 채 유럽 열강의 동네북이었다. 이랬던 삼류 국가 이탈리아가 어떻게 외세의 힘이 아닌 자력으로 통일을 이루고 오늘날 G7 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는 가리발디를 위시한 소위 통일 3 걸이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혼(魂)이라는 마찌니(Mazzini), 두뇌라는 카부르(Cavour), 검(劍)이라는 가리발디(Garibaldi)가 그들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사(storia)와 이야기(storia)는 같은 말이다.’라는 제목의 후지사와 미치오의 책도 있지만, 단지 1천 명의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와 나폴리왕국을 정복하고 그 이후 통일까지 이루는 과정에서 보여준 가리발디의 애국심과 활약상은 그 어떤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역사이고 이야기이다.
산 조반니(San Giovanni) 광장에서 본 메이데이 풍경
자니콜로(Gianicolo) 언덕 벤치에 느긋이 앉아 여유를 부리는데 갑자기 하늘이 껌껌해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소나기가 막 쏟아질 것 같다. 광장을 거닐던 시민들도, 인형극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꼬마들도 어느새 다 흩어져 버린다. 차가 없는 우리는 별수 없이 버스 오기를 기다린다. 간신히 소나기를 피해 내려와 지하철로 산 조반니 역으로 향한다. 카타콤베와 아피아 가도를 가기 위해. 휴일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은 초만원이다. 정차하는 역마다 젊은 남녀들이 몰려 타는데 출근길 서울 지하철보다 더 복잡하다. 산조반니 역에 겨우 도착은 했지만 사람에 떠밀려 간신히 출구로 나오니 밖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비는 질퍽질퍽 오는데 주변엔 경찰이 짝 깔리고 여기저기 구급차도 보인다. 무슨 일 났나?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오래된 성문을 지나 218번 버스 정거장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버스는 안 보이고 그곳에도 사람들이 넘쳐난다. 광장 안쪽으론 흰 대리석의 유명한 라테르노 교회가 보이고 광장 한 모퉁이에는 높다란 야외가설무대와 조명등이 설치되어 있다. 연신 확성기를 통해 높은 톤의 목소리와 요란한 노랫소리가 광장에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오늘이 휴일이라 이곳에서 유명한 가수의 야외 콘서트 아니면 열광 축구팬들의 서포터 모임이라도 있는 건가?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고 여기저기서 요란한 깃발과 휘장이 날리며 구호와 함성이 터지고 있다. 또 한쪽에는 춤마당도 벌어지고 있다. 2~3명의 남녀가 바라보고 손을 치켜든 체 흥에 겨워 돌면서 빠르게 추는 동작이 타란텔라(Tarantella)인가 살타렐로(Saltarello)) 춤인가?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깃발을 든 한 무리의 청년들이 지나간다. 자세히 보니 낫과 망치가 새겨진 공산당 깃발이다. 뭔가 좀 이상하다. 우리는 빨리 이 광장을 벗어나 목적지로 갈 생각으로 버스가 왜 안 오냐? 하고 주위의 경찰관에게 물으니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본다.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니 모든 길이 다 차단되어 있고 차라고는 경찰차와 구급차뿐이다. 그리고 곳곳이 설치된 간이 화장실과 먹거리 가판대들. 시간이 지날수록 광장은 더욱 사람으로 메워지고 시끌벅적한 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모두 상기되고 흥겨운 표정이다. 알고 보니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열린단다.
우리는 우산 속에서 1시간가량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이 광경을 훔쳐보다가 별수 없이 오늘 오후 일정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메이데이 덕분에 우리는 일찍 들어와 쉬게 되고 또 로마 일정을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연기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