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과잉 친절이 불편한 이유
이틀 밤을 머문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의 숙소는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다. 밤새 몇 시간씩 전기가 나가기도 하고 영어도 안 통하고 부엌도 사용하기 힘들고. 그래도 개울가에 있어 물소리 새소리도 들리고 전망도 좋고 무엇보다 값이 싸다.
아침을 먹은 후 체크아웃하고 나오려는데 엊그제 저녁 식당에서 만난 필리핀 아가씨를 또 만난다. 한 달째 페루를 혼자 여행한다는 이 아가씨는 부럽게도 영어와 스페인어 둘 다 아주 유창하다. 실은 그녀는 애초에 페루가 아니라 한국으로 여행 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자(우리는 그냥 일상인데 외국서는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 중 생각한단다) 부모의 강력한 만류로 여행지를 어쩔 수 없이 페루로 바꿨다 한다. 흑산도, 통영, 경주 등 나도 가보지 못한 여행지들을 줄줄이 꿰면서 속사포같이 빠른 영어로 한국 여행을 못 간 아쉬움을 나한테 쏟아붓는데 아주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앞 뒤로 자기 몸만큼이나 큰 배낭을 주렁주렁 메고 나오는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페루 철도 근처의 콜렉티보(Collectivo) 버스 타는 곳을 향한다. 운전대 앞에 졸고 있는 기사한테 쿠스코행임을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는데 30분을 기다려도 나 외에는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로 앞에 보이는 잉카 철도 사무소 직원에게 확인차 물었더니 쿠스코행 콜렉티보 버스는 여기가 아니고 광장에서 주로 출발한다며 친절히 지도까지 그려주면서 그쪽으로 가란다.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왔던 길을 도루 걸어 올라가는데 세련된 차림의 한 백인 중년 여인이 Buenos Dias! 하며 인사를 건넨다. 버스를 타러 내려올 때도 만났던 여인이다. 외모나 옷차림으로 보아선 이런 페루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크리오요(Criollo, 아메리카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계열 현지인) 같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 동양인 할배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유창한 영어로 콜렉티보 버스 정거장까지 길을 안내해 주겠단다.
외국에서 청하지도 않은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호의는 별로 달갑지 않아 사양하는데도 내 앞에서 성큼성큼 먼저 걸어가며 따라오란다. 잉카 철도 직원이 그려준 지도를 보여주며 나도 길은 안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기다. 얼마 안 가 검은색 택시 하나가 내 옆에 차를 세우고 뭐라고 하는데 나는 택시 탈 의사가 없어 대꾸도 안 한다. 그런데 이 여인이 친절하게도(?) 택시 기사와 스페인어로 몇 마디 나누더니 쿠스코까지 16(sixteen) 솔에 태워주겠다는데 타라는 시늉이다. 콜렉티보 버스요금이 10 솔이니 싸기는 한데 별로 내키질 않는다. 잠시 망설이다가 도와주는 사람의 호의를 생각해서 다시 한번 sixteen? 하고 확인한 후 마지못해 탄다.
나는 여행할 때 택시를 잘 타지 않는다.. 무거운 짐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주의이다. 더구나 장거리라면 버스가 훨씬 더 편하고 좋다. 얼떨결에 타긴 탔는데 왠지 좀 찜찜하다. 더구나 기사와는 말도 안 통하고. 택시는 타자마자 쿠스코에서 올 때 눈여겨본 도로가 아닌 듯한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불안감이 확~~. 내 표정이 굳어지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눈치챈 기사가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나? 10여분을 고불고불 좁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비로소 바른길로 접어드는 것 같다. 젊은 택시기사도 답답했는지 이번에는 달리는 차 중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 번역기를 돌려 나에게 보여준다. 이 택시는 큰 택시회사 소속이며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영어로 적혀 있다. 다소 안심이 되긴 했지만 오는 내내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이래서 택시 타기를 싫어한다. 기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불안하고. 이곳 콜렉티보(Collectivo) 버스는 벤츠나 르노 로고가 달린 20인승 정도의 괜찮은 신형 모델들이라 이런 심산유곡 험한 길에서는 훨씬 더 안전하고 심심하지도 않은데. 아름다운 여인의 호의를 뿌리치지(?) 못한 탓에 이 고생이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행히 택시는 한 시간 반을 무사히 잘 달려 쿠스코의 민박집 앞에 나를 내려 주는데 고마운 마음으로 택시요금으로 20 솔을 주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Sesenta(60)! Sesenta! 한다. 60 솔이란 말이다. 무슨 소리! 내가 분명 그 여인에게 sixteen(16)이냐고 재차 묻기까지 했는데. 사람이 없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고.
나는 택시를 탈 때는 언제나 현지 숫자로 흥정한다. 그리고 스페인어는 영 먹통은 아니어서 조금 할 줄 안다. 스페인어로 16(dieciseis)과 60(sesenta)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영어의 sixteen과 sixty는 늘 헷갈리는 편이라 확인한다고 했는데... 어쩐지 너무 싸더라. 나는 더 다투기도 싫고 60 솔(20,000원)도 거리에 비하면 비싼 편은 아니라 허허! 하며 주고 내린다. 이래서 난 택시가 늘 불편한가 보다.
지난번에 머문 민박집에 짐을 내려놓고 바로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한다. 오늘도 날씨는 참 좋다. 토요일 오후의 아르마스 광장은 사람들로 더욱 붐비고 활기찬 분위기이다. 내가 먼저 찾은 곳은 지난번에 한 번 왔던 초콜릿 박물관(Choco Museo). 말이 초콜릿 박물관이지 약간의 규모가 있는 초콜릿 전문점이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콜릿을 파는 곳인데 초콜릿 교실이 매일 오전 오후로 있다는 광고문을 본 기억이 나서이다.
예약도 안 하고 왔는데 수강생은 나 혼자뿐, 그런데도 기꺼이 OK다. 수강료는 75 솔(25,000원). 카추어 족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강사 아벨(Abel)은 먼저 10여 분간 유창한 영어로 초콜릿의 역사와 원산지 등을 간단히 소개한 후, 자기들 농장에서 따왔다는 카카오 빈(Cacao Bean)을 나더러 직접 진흙으로 만든 도기로 볶고(roasting), 갈게(grinding) 한 후 카카오 매스(Cacao Mass)를 만들어 그 옛날 왕과 귀족들만 먹었다는 마야(Maya)식 전통 초콜릿 음료를 만드는 과정과 현대식 초콜릿 제조방식을 직접 같이 시연하면서 실습 위주의 수업을 한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초콜릿에 대해 관심이 많아 책도 구해 읽고 집에서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즐겨 먹곤 하는데 여행을 할 때면 유명한 초콜릿 점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내 나름 초콜릿에 대해 제법 안다고 생각해 왔지만,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은데 아벨에게 물으니 시원스럽게 잘도 답해 준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멕시코 여행을 할 때도 멕시코 동부의 비야에르모사(Villahermosa)까지 일부러 찾아가 카카오 농장 여러 곳을 고생스럽게 찾아다녀본 기억도 있다. 하지만 막상 초콜릿 수업을 들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언젠가 어린아이들과 부모를 상대로 어떤 초콜릿이 좋은 초콜릿인지, 좋은 초콜릿을 어떻게 적은 비용으로 직접 집에서 만들 수 있는지 하는 초콜릿 무료교실을 열어 볼 꿈을 가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 같은 할아버지 수업을 아이들이 좋아할까? 내가 아는 한 초콜릿은 정말 좋은 기호식품이다. 그런데 좋은 초콜릿은 너무 비싸고 싸구려 초콜릿은 아이들의 치아와 건강을 해칠 수도 있어 권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도 초콜릿 전문점에서 가끔 초콜릿 교실을 열고 있지만 대부분 너무 상업적이다. 수업료도 비쌀뿐더러 이미 만들어진 커버추어를 가지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템퍼링(Tempering)과 모양 만들기(Moulding) 등의 단순 과정을 강의하고 있어 나는 별 흥미가 없었다.
내 생애 첫 초콜릿 수업은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다. 아벨과의 독 과외수업이라서 더욱 그런가? 2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다. 마치고 나니 내가 만든 초콜릿을 예쁜 봉지에 포장해서 준다. 와! 손자들한테 자랑해야지. 초콜릿은 원래 남미가 원산지이다.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는 아마존 상류의 중산간에서 자라는 야생나무의 열매였는데 이후 멕시코 등 중앙아메리카에서 정착되어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마야(Maya)와 아스텍(Aztecs) 시대 황제나 귀족들만이 마실 수 있는 아주 귀한 음료였으며 카카오 빈은 화폐로도 유통될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남미는 초콜릿의 원조인 셈이고 지금도 최고급 카카오는 주로 남미에서 소량 생산되는데 그중에서도 크리오요(Criollo) 종은 최고급 초콜릿에 사용되는 매우 비싸고 귀한 카카오로 대접받는다. <불의 기억>과 <수탈된 대지> 등을 쓴 남미의 유명한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는 그의 책 <거울 너머의 역사>에서 남미의 카카오를 이렇게 칭송하고 있다. '카카오는 태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카카오 속에는 태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초콜릿이 주는 쾌락과 행복감은 카카오 속에 들어 있는 태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초콜릿 앞에 서면 나는 어린애처럼 마냥 행복해지고 즐겁다. 돌체 아마로(Dolce Amaro)! 아! 언제나 달고 쌉쌀한 초콜릿이여!
나는 내가 만든 초콜릿 봉지를 어린애처럼 의기양양 손에 들고 다시 광장으로 나오는데 와! 대박이다. 오늘따라 광장에 이런 멋진 행사가 있을 줄이야!
오늘 무슨 유명한 축제가 있는 날인가 보다. 밴드를 따라 춤까지 추면서 이어지는 붉고 화려한 페루 전통복장의 퍼레이드는 오늘따라 너무나 청명한 하늘 아래 눈부시게 어울리는 멋진 광경이다. 광장은 이래야 하는 건데... 온통 촛불과 태극기와 확성기 소리로 서로 어르렁거리며 허구한 날 정치 집회로 날을 새는 광화문 광장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근 한 시간 가까이 신나는 공짜 구경을 하고 찾아간 곳은 쿠스코의 유명한 전통시장 산 페드로 시장(San Pedro Mercado). 들어서니 남대문 시장처럼 없는 것이 없다. 온갖 값싼 먹거리에서부터 과일, 채소, 각종 고기와 기념품점까지 야마 인형을 손자들에게 사주고 싶은데 내 캐리어가 아직은 터질 듯이 가득 차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인디오 할머니한테 계란 4개를 2 솔에 산다.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날. 한 손엔 초콜릿 봉지, 한 손엔 계란 봉지. 오늘은 왠지 부자가 된 기분이다. 언짢은 일도, 즐거운 기억도 많은 쿠스코여! 아르마스 광장이여! Adios! 나는 내일 파타고니아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