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시시해지면 마추픽추에 가라

누구나 가는 마추픽추?

by 남쪽나라


새벽 1시에 잠이 깨지는데 도무지 더는 잠이 오지 않는다. 밖의 개울 물소리 때문인가? 어젯밤에는

자장가처럼 들리더니 한밤중에는 요란한 폭포수 소리 같다. 몸이 무척 무겁고 눈꺼풀이 달라붙는다. 그래도 아침을 단단히 챙겨 먹고 서둘러 페루 열차(Peru rail) 정거장으로 걷는다. 페루 레일 티켓은 한국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샀다. 불과 1시간 반 거리의 철도 요금이 왕복 150불(미화)이 넘는다. 그것도 25% 프로모션 가격으로.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은 쿠스코에서 페루열차를 타고 아구아 칼리엔테스(Agua Calientes) 역까지 바로 가는 것. 편한 만큼 기차표값이 비싸다. 두 번째는 나처럼 오얀타이탐보까지는 버스로 와서 이곳에서부터 페루 열차(Peru Rail)나 잉카 열차(Inca Rail)를 타고 아구아 칼리엔테스(Agua Calientes)까지 가는 방법. 기차 요금도 절약할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편이다. 아니면 현지 투어를 이용하여 가는 도중의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고 오얀타이탐보까지 갈 수도 있다.


잉카 트레일 지도

세 번째는 잉카 트레일(Inca Trail), 잉카인들이 걸었던 그 길을 3박 4일 동안 걸어서 마추픽추까지 가는 방법. 잉카 트레일(Inca Trail) 걷기야말로 고생스럽긴 해도 제대로 잉카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어서 나는 이 길을 걸어보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트레킹이란 걸 해본 적이 없고 또 잉카 트레일은 4,000미터가 넘는 고개를 넘어야 해서 나 같은 노인네에게는 넘사벽으로 여겨져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좀 더 알아보니 잉카 트레일 걷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팀을 짜서 가이드와 함께 걷고, 현지 포터가 짐을 날라주며 잠자리와 식사까지 다 마련해 주기 때문에 가벼운 배낭 차림으로 걷기만 하면 된다. 단지 중간에 4,215미터 높이의 Warmiwanusca Pass(고개)를 넘을 때 고산병이 발병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트레킹 비용은 미화 650불 정도. 3박 4일에 가이드 동반, 먹고 자고 입산료 포함해서 이 정도면 그다지 비싼 편도 아니다.


오얀타이탐보에서 아구아 칼리엔테스까지는 고작 30.5km 거리이다. 시간이 충분하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페루 열차(Peru Rail)는 이 짧은 거리를 무려 1시간 50분이나 걸려 간다. 천천히 구경하면서 가라는 친절한 배려(?)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알고 보니 페루 레일은 페루인의 열차가 아니다. 이름만 페루 레일일 뿐 실은 영국회사가 운영하는 열차이다. 말하자면 영국 자본으로 철도를 건설해 주고 비싼 요금으로 투자비를 뽑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럭셔리 열차처럼 홍보하던 페루 레일의 전망돔(Vistadome) 칸은 막상 타보니 천정만 유리로 되어 있을 뿐 그저 그런 흔한 관광열차다. 스튜어디스 차림의 직원들이 가는 도중 차와 스낵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도 없다.


내 자리는 역방향인 데다 전후좌우 독일 단체 관광객들로 가득한 데 마치 자기네 안방처럼 심하게 떠들고 있다. 조용히 안데스의 산들을 감상해 보리라는 나의 기대는 물 건너갔다. 문득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안데스 산길로 배낭을 멘 트레커 둘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와! 나도 저들처럼 걷고 싶었는데 하는 진한 아쉬움 때문인지 더욱 객차 내의 소란함이 싫어진다.


몇 해 전 호텔스닷컴에서 꼴불견 해외여행 국민 순위를 매긴 것을 본 적이 있다. 자타가 인정하는 꼴불견 1위 국가는 당연히 중국이다. 그런데 2위와 3위가 영국과 독일이다. 영국은 홀리간으로 워낙 악명 높으니 이해가 가는데 독일이 3위라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열차 안에서 보니 수긍이 간다. 개별적으로 볼 때 독일사람은 대체로 젊잖고 진중해 보이지만 여럿이 있을 때는 전혀 다르다. 더욱 술이 들어가면 떠들어 대는 독일 말소리는 그 딱딱한 자음들이 합해져 거의 공해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제국의 카를로스 5세가 이렇게 말했을까? "짐은 신에게 말할 때는 스페인어로, 여인에게 말할 때는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게 말할 때는 프랑스어로, 말에게 말할 때는 독일어로 한다"


이런 시끌벅적한 열차 분위기인데도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억제하기가 힘들다. 간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잔 데다가 그동안의 시차와 피로가 겹쳤기 때문인가? 그렇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는다. 내가 얼마나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 비싼 페루 열차를 타고 바깥 경치를 보지도 않고 졸 수야 없지! 시간이 지날수록 열차는 안데스의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서는데 철로를 따라 흐르는 계곡 너머로 깎아 세운 듯한 절벽들이 운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안돼! 안돼! 수 없이 속으로 소리 지르며 졸리는 눈으로 창밖 풍경을 보며 안간힘을 쓰는 사이 열차는 벌써 아구아 칼리엔테스 역에 도착하고 있다.


12시 입장 시간까지는 2시간 반이나 남았다. 페루 관광청은 얼마 전부터 마추픽추 하루 입장객 수를

2,500명으로 제한하고, 오전 오후로 나누어 입장시키고 있다. 6시부터 12까지 타임과 12시부터 5시까지 투 타임으로. 그런데 오전 입장보다는 오후 입장이 조금 더 안전하다. 왜냐하면 깊은 산속이라 아침에는 구름이나 안개가 많아 자칫하면 마추픽추를 못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구아 칼리엔테스 중심 광장

마추픽추를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아구아 칼리엔테스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오전에 마추픽추에 오르는데 나는 일부러 오얀타이탐보에서 자기로 했다. 오얀타이탐보는 방값도 싸고 잉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도시이이다. 하지만 아구아 칼리엔테스는 순전히 마추픽추를 가기 위한 거점 도시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다 할 볼거리도 별로 없고 시내는 온통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들뿐이다.


좁은 시가지 골목들을 한 바퀴 돌고 와도 시간이 많이 남아 나는 어느 잉카 황제의 조악한 청동상이 서 있는 광장 벤치에 앉아 졸기도 하는데 영 시간이 가지 않는다. 졸음이 오는데 잠은 안 들고, 한마디로 피곤하고 몸컨디션이 엉망이다.


마추픽추 간이역

광장 건너편 철길 가에는 <Machupicchu>라고 써진 노란 색깔의 작은 역사(驛舍) 하나가 서 있고 맞은편에는 꽤 큰 역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주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기차역인 것 같다. 11시 30분경 생수 한 병과 샌드위치 하나를 사 들고 마추픽추 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는 마추픽추와 아구아 칼리엔테스를 오가는 셔틀버스이다. 승객이 차면 출발하는데 줄 서 있는 행렬이 100미터도 넘는다. 요금은 역시 비싸고 외화로만 받는다. 20불 정도.


마추픽추 입구의 트럼펫 나무들

천길 낭떠러지의 아찔한 안데스 산길을 구불구불 20여 분 정도 천천히 오르더니 드디어 버스는 마추픽추 입구에 우리를 내려준다. 탈 때만큼이나 긴 줄이 내려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입구에 흐드러지게 핀 트럼펫 나무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우리를 환영해주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긴 행렬이 이어지는데 마추픽추로 들어서는 순간 지금까지의 피곤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정신이 생생하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마치 주말에 청계산이나 관악산을 오를 때처럼 앞사람 엉덩이만 보며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가파른 계단을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오르니 발아래로 사진과 영상에서 보던 마추픽추의 전경이 조금씩 전개되기 시작한다. 날씨는 쾌청하지는 않지만, 마추픽추를 가리는 구름이나 안개는 다행히 없다. 혹시나 놓칠세라 폰카로 잽싸게 사진을 담으며 한발 한발 계단을 더 오르니 시야는 점점 더 트이고 전망은 더욱 장관이다.


마추픽추를 대표하는 전경

아! 드디어 마추픽추에 왔구나! 감격이 밀려온다. 가장 높은 지점까지 올라와 자그마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고생과 피로가 일순간에 사르르~~ 왜 사람들은 마추픽추에 이처럼 열광할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하고 깊은 안데스의 산 중의 수백 년 동안 잊혔던 공중도시, 600년 전 해발 2,400m 수직의 깊은 산속에 말과 소는 물론 수레도 없고 철기도 사용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어떻게 100톤 이상의 화강암을 옮기고 다듬고 수로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사람이 거주했는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잉카문명의 미스터리. 지금도 아무에게나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멀고도 먼 길. 어디에선가 읽은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세상이 시시해지면 마추픽추에 가라'


나는 아직 세상이 시시해지지는 않았지만, 마추픽추엘 왔다. 그리고 감격한다. 마추픽추의 경이에 감격하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에 감격한다. 조심스럽게 샌드위치 도시락을 꺼내 발아래 전경을 내려다보며 점심을 먹는다. 세상 어디에서 맛본 적이 없는 인생 최고의 점심을.




점심을 먹고도 일어나기 싫어 한참을 더 앉아 있다가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5시까지는 나가야 하니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한 군데씩 찬찬히 돌아보는데 굳이 가이드가 필요하며 해설이 필요할까? 눈길 가는 곳이, 발길 닿는 곳이 곧바로 역사이고 경이인데.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마추픽추에는 안내판이나 표시판이 붙어 있지 않다. 단지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방향 표시만 눈에 띈다. 일단 진행 방향을 벗어나면 오던 길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현장 요원들이 지키고 있다.


안내표시가 없어도 지나다 보면 그곳이 신전이었는지, 주거지였는지, 창고였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가끔은 중요한 포인트를 놓칠 수도 있다. 나는 사전에 마추픽추 유적에 대한 세세한 공부를 못해서 중요한 곳 몇 개를 놓치기도 하는데, 설사 제대로 다 못 본들 어떠리! 내가 지금 이곳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데. 그들의 돌 다듬는 솜씨는 마추픽추 어느 곳에서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말 신기에 가깝다.





방향 표시판을 따라 걸으며 사진도 찍고 천천히 내려오니 출구 쪽에 야마(llama) 두 마리가 길을 막고 서 있다. 모두 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마추픽추에 머물렀던 시간은 불과 3시간 반. 가슴 벅찬 감격과 행복을 느끼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열차는 값이 조금 싼 익스피디션(Expedition) 칸을 타는데 역시나 소란스럽다. 갈 때는 단체 여행객들로, 올 때는 젊은 백팩 족들로 가득하다. 이 멀고도 먼 마추픽추도 이제는 너무 상업적 관광지가 돼버린 듯. 옆자리의 동양계 젊은 미국인 4명이 맥주판을 벌리며 영어로 제 세상인 듯 떠들고 있다. 보아하니 한국계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다른 편에는 입을 헤~ 벌리고 늘어지게 자고 있는 여성 백팩 족도 보인다. 페루 레일의 낭만(?)이 이런 것인가?


숙소가 있는 오얀타이탐보에 내려 늦은 저녁을 먹으려 광장으로 가니 광장 한가운데 가설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무대 아래로 앳돼어 보이는 젊은 남녀 20~30명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데 춤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페루 전통춤 같기도 하고 퓨전 춤 같기도 하고. 광장 모퉁이 식당의 노천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춤은 리드미칼 하고 동작도 자연스럽다.


오얀타이탐보(2,792m)는 잉카제국의 소위 '신성한 계곡'의 중심 도시이자 교통의 요충지로서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기도 한 역사적 도시이다. 오얀타이탐보는 <작은 마추픽추>로 불릴 정도로 잉카 시대의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그 당시의 관계시설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또한 피사로의 침공 시 스페인 군대에 끝까지 저항한 잉카 최후 항전의 본거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컴컴한 밤길에 어디에선가 페루 전통악기인 Zampona(대나무로 만든 팬파이프 일종)과 Quena(피리) 소리가 어둠에 묻어 크게 들려온다.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들고 물었더니 바로 앞의 유적지에서 나는 소리란다. 가끔 저녁에 유적지에서 전통악기 연주행사가 있는데 지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단다. 그렇지만 오늘은 도저히 피곤해서 갈 여력이 없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씻고 잠자리에 드는데 오늘 밤은 제발 잠이 잘 오기를...

















keyword
이전 15화잉카제국이 남긴 흔적들 - 쿠스코(Cu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