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티켓을 보고 그냥 질렀습니다.
마추픽추 여행을 끝내고 떠나려는 날, 며칠간 민박집에서 친해진 일본인 영감이 내게 묻는다. '파타고니아는 왜 가냐고?' 파타고니아가 어디쯤 있는지도 잘 모르는 그에게 나는 사실대로 솔직히 대답한다. '싼 티켓이 있어 그냥 가보려고 질렀다.'라고. 사실 1~2천만 원 정도는 족히 든다는 남미 여행은 나 같은 가난한 은퇴자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볼 수 없는 여행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니 한국에서 페루 리마까지 단돈 미화 700불짜리 프로모션 티켓(왕복)이 뜨지 않는가? 막연히 마추픽추 여행을 꿈꾸기만 하던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나의 티켓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리마에서 이름만 듣던 남미 최남단 파타고니아까지 단돈 300불짜리 왕복 티켓(저가항공이 아닌 국영 LATAM항공사))이 있는 걸 보고 또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 여정이 얼마나 길고 힘든지도 모르고.
같은 남미 대륙이지만 쿠스코(Cusco)에서 파타고니아(Patagonia)로 가는 길 역시 간단치를 않다. 일단 리마(Lima)까지 다시 나와야 한다. 리마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정복한 후 본국과의 왕래를 위해 새로 건설한 항구도시로서 페루의 오래된 수도이다. 나는 리마의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지구의 한 민박집에 짐을 풀고 근처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지구는 리마의 신시가지로 서울의 강남 같은 곳이다. 도시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사람들도 모두 선남선녀 차림으로 여유롭고 부티 난다. 케네디(Kennedy) 공원까지 걸어 보는데 공원 근처의 라루차(La Lucha)라는 샌드위치 가게 앞은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이어져 있다.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지 한 직원이 나를 보자 대뜸 한국말로 인사까지 하고 주문도 도와준다. 헐!
며칠간 잠을 잘 못 자 피곤하지만 내친김에 리마에서 유명하다는 라르코마르(Larcomar) 해변까지 걷는다. 탁 트인 태평양 바다와 넓은 모래사장 위로 펠라글라이더가 날아다니고 바닷가 쇼핑몰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쿠스코와 오얀타이탐보에서 보던 페루와는 전혀 딴 세상이다. 오랜만에 나도 그들 틈에 섞여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장도 보고 맥주도 한 병 사 와 저녁을 해 먹고 일찍 잠을 청한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가야 하니까
어젯밤도 잠을 제대로 못 잤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챙겨 5시 반에 민박집을 나온다. 파타고니아로 가려면 칠레의 최남단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까지 비행기로 가서 버스 편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의 관문인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모레나(Moreno) 빙하가 있는 아르헨티나의 엘 칼라파테(El Calafate) 공항으로 들어가는 두 경로 중 각자의 일정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나는 리마에서 출발,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하여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까지 가야 한다. 인천에서 고작 미화 1,000불 정도로 파타고니아까지 갔다 올 수 있는데 웬만한 불편함이야 당연히 감수해야지. 아침 9시 45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산티아고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하여 칠레의 최남단 공항 푼타 아레나스( Punta Arenas)에 저녁 9시경에 도착한다. 밖을 보니 깜깜하다.
오는 도중 비행기에서 어쩌다 창밖을 내려다본 어느 한순간, 구름 위로 선명하게 솟은 피츠로이(Fitzroy)와 세로토레(Cerro Torre)의 송곳같이 날카롭게 치솟은 암봉들은 벌써 내 가슴을 소년처럼 뛰게 한다. 환승 시간을 포함 11시간의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하고도 남는다. 드디어 한반도 면적의 5배가 넘는 거인의 땅 파타고니아(Patagonia)에 온 것이다. 바람이 지배하는 광활한 들판, 순백의 빙하,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치솟은 암봉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남미 최고의 원시 대자연 속으로 내가 들어온 것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의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칠레 쪽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의 관문인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까지 버스로 3시간을 또 이동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젤란 해협의 바다는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광활한 들판 너머로는 만년설을 인 설산이 푸른 하늘 아래로 눈부시다. 남미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젤란 해협은 1520년 마젤란이 처음 발견하였는데 그 길이만 총 560km에 달한다. 마젤란 해협은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는 유일한 항로였는데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더세기로 유명하다.
마젤란은 매우 힘든 항해 끝에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파타고니아에 상륙하면서 이 땅에는 분명 거인(Patagon)들이 사는 땅일 거라 지레 겁먹고 Patagonia(거인의 땅)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과연 어떤 파타고니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PS: 이하 파타고니아 여행의 내용 일부는 본인의 졸저 <나의 세계 트레킹 이야기>의 파타고니아 편에서 일부 인용된 부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