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파타고니아를 걷다니!- 초행자의 행운

걷기 위해 간 것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걸었다. 그런데..

by 남쪽나라

사실 나는 파타고니아가 어떤 곳인지도 잘 알지도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세계테마여행>에서 어쩌다 한 두 번 본 적이 있는, 너무나 멀고도 먼 곳에 있는 '그림의 떡' 정도. 그러다가 어쩌다가 본, 내가 좋아하는 독일의 영화감독 헤어조크(Herzog)의 영화 <세로토레, 원제"The Scream of Stone">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산 <세로토레>와 굉음을 내며 호수 위로 떨어지는 모레노 빙하를 보고 '와! 파타고니아 정말 멋있는 곳이구나! 한 번 가봤으면 좋겠네!' 막연히 상상해본 것이 내가 아는 파타고니아의 전부였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더라. 지리산, 한라산 등 한국의 높은 산들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고 제주 올레길 한 번 걸어 본 적 없는 70대 노인이 혼자서 이 먼 파타고니아까지 오다니! 나는 사실 이 파타고니아를 걷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다. 단지 1000불짜리 티켓이 있어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하지만 막상 와서 보니 파타고니아는 어슬렁어슬렁 차 타고 관광이나 하는 곳이 아니다. 걸어야만 하는 곳이다. 파타고니아를 상징하는 토레스 삼봉이나 피츠로이, 세로토레 등 명소는 차로는 절대 접근할 수 없고 오로지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첩첩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거리이다.


그렇다고 준비를 전혀 안 해온 것은 아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제범 큰 백팩도 하나 사고 싸구려 스틱도 샀다. 하지만 등산화는 무거워 신고 오지도 않았고 그냥 평소 신던 캐주얼 신발뿐이다. 복장도 10여 년 된 후줄근한 등산복 차림이니 그저 동네 뒷산이나 오르는 그 폼 그대로이다. 그나마 많이 챙겨 온 것은 라면과 햇반 등 넉넉하게 챙겨 온 먹거리뿐인데 이것들이 나중에 뜻밖에 효자노릇 할 줄이야. 나의 무식한(?) 파타고니아 트레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첫째 날

나의 생애 첫 트레킹은 트레커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하다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내의 W코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시외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거인의 땅은 한국에서 온 영감을 반겨 주듯 상쾌한 하늘을 펼치고 있고 저 멀리 호수 너머 토레스 삼봉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20171101_084933.jpg?type=w773 호수 넘어 보이는 살산과 토레스 삼봉

배를 타고 페오에 호수를 건너 오늘의 첫 숙소인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 도착한다. 산장 주변부터 벌써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압도적 풍광이 펼쳐 저 있다. 얼른 점심을 챙겨 먹고 드디어 내 생애 첫 트레킹의 발을 디디는데 설레면서도 떨리고 두렵다. 제주 올레길 한번 가본 적 없는 70이 넘은 노인이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두려움도 한순간 나는 그레이 빙하를 항하여 힘차게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천천히 스틱에 의지 한 채.


20171101_154410.jpg?type=w773 그레이(Grey) 빙하 모습

그레이 빙하 전망대까지는 비교적 쉽고 무난한 길이다. 왕복 5시간 정도의 길지 않은 코스이다. 설산과 호수와 빙하를 바라보며 풍광에 취하여 정신없이 걷다 온 하루이지만 내가 파타고니아를 이렇게 걷다니 믿어지지 않는 하루이다. 피곤함보다 가슴 벅찬 감격이 밀려온다. 이런 트레일이라면 며칠씩이라도 걷겠다는 뿌듯한 자신감과 함께.


둘째 날

어제 생애 첫 트레킹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오늘 좀 더 멀리까지 가보기로 한다. 유명하다는 브리타니카 전망대까지 왕복 26km 거리. 스코츠버그 호수를 따라 이탈리아 캠프까지 2시간 반 정도의 트레일은 환상적일 만큼 아름답고 길마저 비교적 평탄하다. 걸으면서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즐겁고 재미있다.


20171102_190906.jpg?type=w773 스코츠버그 호수를 따라 걷는 길

하지만 편하기는 딱 거기까지이다. 이탈리아 캠프에서 프란세스계곡을 거쳐 브리타니카 전망대에 오르는 길은 너덜길에다 경사도 심하여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조심조심 긴장한 채 올라야 한다. 하지만 마침내 브리타니카 전망대에 올라서니 360도 파노라믹 뷰에 기막힌 파타고니아의 절경이 펼쳐진다.


20171102_143320.jpg?type=w773 브리타니카 전망대에서

'브리타니카 에 와보지 않았다면 파타고니아에 갔다 왔다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구나. 사방으로 펼쳐지는 절경과 분위기에 취해 한동안 멍 때리기를 한다. 한참을 머물다가 어쩔 수 없이 산을 내려와 숙소까지 귀환하니 저녁 8시경. 장장 오늘 하루 11시간을 걸은 것이다. 의기양양! 나 초보 트레커 맞아? 피곤은 간데없고 기쁨과 행복이 밀려온다. 걷는 자의 행복이 이런 거구나!


셋째 날

어제 페오에 호수를 건너 다시 돌아와 파이네 산장에서 1박을 하고 오늘은 파이네 그란데 국립공원의 상징 토레스 삼봉을 오르는 날이다.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경관 토레스 삼봉까지는 왕복 19km 거리이지만 마지막엔 급경사 길을 1시간 정도 올라야 하기 때문에 만만한 트레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파타고니아 날씨지만 내가 걷는 사흘 내내 날씨는 더 할 수 없이 청명하고 좋다. 소위 말하는 <초행자의 행운>의 연속이다. 길은 시작부터 편하지는 않지만 5.5km 지점의 칠레노 산장까지는 비교적 무난하고 어렵지 않다. 하지만 칠레노 산장을 지나서부터는 상당히 가파른 깔닥고개가 시작된다. 좁은 길에는 각국에서 온 트레커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어떤 구간에서는 병목현상마저 일어난다. 그리고 드디어 크고 작은 바위로 이루어진 너덜길이 나타난다. 매우 미끄럽고 위험스럽다.


긴장 한 체 스틱을 꽉 잡고 조심스럽게 오르는데 아차 하는 순간 바위에서 꽈당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고 만다. 정신이 혼미하고 피가 벌겋게 바위에 물들고 있다. 순전히 신발 때문이다. 접지력이 좋은 등산화가 아닌 다 달아빠진 캐주얼화를 신었더니 물기에 여지없이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앉아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영어로 괜찮으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온다.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 나를 부축하여 편안한 자리에 앉힌다. 이어 한 중년여성이 다가와 이마의 상처부위를 살피더니 그들이 가져온 응급키트를 꺼내 지혈을 해주고 거즈까지 붙여준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닌 것 같으니 바로 하산하여 병원으로 가란다. 알고 보니 그녀는 프랑스에서 온 단체 트레커의 일원으로 진짜 의사란다.


이런 천운이 또 있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불어 <메르시 보꾸>를 연발하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잠시 앉아서 평정심을 되찾은 후 토레스 삼봉까지 올라간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마정도 찢어지기 망정이지 다리를 다쳤다면 트레킹이고 뭐고 당장 헬리콥터를 불러 하산해야 했을 텐데.


20171104_132126.jpg?type=w773 장엄한 토레스 삼봉

옅은 구름이 면사포처럼 살짝 깔린 맑은 하늘 아래 회색빛 호수 위로 우뚝 솟은 토레스 삼봉을 보는 순간 나의 감동은 배가 된다. 뿌듯한 성취감과 안도감, 그리고 오늘따라 설명하기 힘든 온갖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벅차오른다. 정말 장엄한 경관이다. 빙하와 침봉, 호수가 아우르는 놀라운 조화는 과연 남미 최고의 비경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호숫가에서 충분한 휴식과 점심을 먹은 후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산한 후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큰 병원에서 3 바늘을 꿰매는 응급조치를 받고 이마에 커다란 거즈까지 붙였지만 나의 마음은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 트레킹 왕초보가 드디어 그 유명한 파타고니아 W코스를 혼자서 무사히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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