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 공항에서의 티켓 소동
인천서 미국 달라스까지 12시간, 달라스 공항에서 6시간 환승 대기. 달라스에서 페루 리마까지 6시간,
페루 리마 공항에서 5시간 환승 대기. 쿠스코까지 1시간 반. 무려 30시간 만에 쿠스코에 도착한다. 비행시간보다 환승 대기시간이 더 지루하고 힘들다. 기내에서는 먹을 것도 주고 영화도 보고 잠도 잘 수 있지만, 환승 공항에서는 별도리 없이 시계나 보며 기다려야 한다. 어쨌든 나는 지금 페루에 왔다. 단지 마추픽추를 보기 위하여.
그런데 멀고도 먼 페루라서 그런가? 뜻하지 않은 사건들이 줄줄이 생길 줄이야!. 리마 공항에서 쿠스코(Cusco)로 가기 위해 국내선 Check-In 기계 앞에서 수속을 하려는데 도무지 진행이 안 된다. 할 수 없이 탑승 카운터로 가니 정장 차림의 LATAM 항공사 직원들이 내 항공권을 들고 이곳저곳으로 왔다 갔다 하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린다. 예감이 영 좋지 않다. 뭐가 잘못된 건가? 그러기를 한참 후에 Bruno라는 명찰을 단 젊은 직원이 내게 다가왔다.
유창한 영어로 내 항공권은 페루 내국인 요금이 잘못 적용된 것이니 미화 177불을 추가로 더 내야 한단다. 그리고 수화물료 30불도 따로. 뭐라꼬? LATAM 항공 카운터 앞에서 Bruno와 길고 긴 입씨름이 계속된다. 무려 20여 분간이나. 두 달 전에 Skyscanner에서 무려 100불(미화)을 지불하고 산 티켓인데 뭔 소리지? 나는 또 페루 리마(Lima)에서 4600km 거리의 남미의 최남단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까지 같은 항공사의 왕복 티켓을 300불에 샀는데, 불과 600km 거리의 쿠스코까지 국내선 요금이 300불이라니 말이 되나? 바가지도 유분수이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영어 단어와 몸짓과 성난 표정까지 섞어가며 용감히(?) 싸우고 또 싸웠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단다.
그제야 내 항공권 맨 밑의 깨알같이 작게 스페인어로 써진 조건 란을 읽어보니 외국인에게는 약간의 추가 요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내국인 요금과 외국인 요금이 다르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추가 요금이 3배나 되다니? 싸움의 결과는 내 혈압만 올려놓고 나의 일방적 완패로 끝나고 만다. 이 비행기를 못 타면 나는 20시간 넘게 걸리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별도리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카드로 207불(미화)을 긁으니 속이 부글부글, 욕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는다.
잔뜩 부어오른 얼굴로 12시경 쿠스코 공항에 내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택시 승차장으로 나오니 택시기사들이 줄을 서서 호객하고 있다. 영어도 들리고 일본어도 들린다. 20 솔(Sol)에서 10 솔까지 기사마다 부르는 값이 제 각각 다르다. 나는 민박집 주소를 보여주며 영어를 할 줄 안다는 택시기사와 15 솔에 흥정을 하고 택시를 탄다. 일본어도 하고 영어도 할 줄 안다고 자랑하는 택시기사는 나를 숙소 근처에 내려주긴 하는데 20 솔을 주니 잔돈이 없단다. 허허!! 200불도 넘게 바가지를 썼는데 그래 이 정도는 애교로 봐주자.
부킹닷컴의 리뷰(평점 9.1)를 보고 예약한 민박집은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데 욕실 달린 커다란 방에 부엌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나쁘지 않다. 마침 점심때라 컵라면으로 얼른 요기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내 지갑에서 20불이 온데간데없다. 분명 짐을 풀면서 환전하기 위해 200불을 따로 빼서 지갑에 넣은 후 침대 위에 그냥 두고 나왔는데 20불짜리 한 장이 사라진 것이다. 작은 민박집이라 방심하고 문을 안 잠그고 나온 나의 불찰이지만 황당하다. 누가? 언제? 지갑째 몽땅 가져가지 않고 왜 20불만 빼갔을까? 누군가 짐작은 가지만 증거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하리. 오늘은 여러 가지로 일진이 좋지 않나 보다.
눈도 천근만근 무겁고 기분도 엉망이어서 침대에 눕고 싶지만 지금 잠이 들면 곤란해 억지로 외출 채비를 하고 숙소를 나온다. 조금 전까지 맑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숙소에서 쿠스코의 중심 아르마스 광장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정도 거리이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나는 번잡한 중심가보다는 좀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숙소를 더 선호한다. 우선 방값이 싸기 때문이지만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을 좀 더 가깝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통은 당연히 불편하다. 하지만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고 관광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될 기회가 더 많아 좋다.
주택가에 위치한 숙소 주변 길은 비교적 넓고 잘 정돈되어 있다. 널 따란 길을 지나 구시가로 들어가는 길목에 오래된 작은 아치 하나가 서 있다. 아치를 지나 구시가 쪽으로 들어서니 스페인 식민시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나타난다. 나무로 만들어진 발코니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고 건물 아래로는 오래된 회랑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다.
은행과 상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 길거리 벤치에는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인디오 노인들의 시선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고, 현지인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듯한 관광객의 무리가 거리를 꽉 채우고 있다. 비로소 쿠스코(Cusco)에 온 느낌이 든다.
길가의 한 은행에서 200불을 환전한 후 번잡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니 마침내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 나온다. 먼저 광장 근처의 페루 문화청 사무실부터 찾아가 마추픽추 입장권을 152 솔(미화 48불)에 산다. 그런데 같은 입장권을 온라인에서는 카드 수수료 6%까지 보태 74불에 팔고 있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선 무엇이 정답인지 혼란스럽다.
남미의 여느 광장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마스 광장에는 오래된 커다란 교회 건물과 고풍스러운 식민시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정면의 커다란 교회 건물은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정복한 후 1559년에 시작해서 100년에 걸쳐 건축되었다는 쿠스코 대성당이고, 광장 왼편에도 또 다른 스페인 바로크 스타일의 교회가 하나 더 서 있고 광장 중앙에는 잉카를 제국으로 만든 어느 황제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광장은 생각보다 크지도 않고 막상 서니 별다른 감동도 없다. 오늘 엉망이었던 기분 때문일까? 아니면 때마침 먹구름이 쏟아붓기 시작하는 비 때문인가? 광장에선 제대로 사진 한 장도 찍지 못한 채 비를 피해 가까운 골목으로 뛰어든다.
어딘지도 모르고 접어든 골목길은 과연 쿠스코답게 잉카시대 만들어진 듯한 반듯한 사각 돌 담벼락으로 이어져 있고 우산도 쓰지 않은 관광객들이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골목길 어귀 한 곳에 한글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한국 여행사 간판이다. 투어 정보도 알아보고 비도 피할 겸 해서 2층 사무실로 올라가니 한국인 사장은 안 보이고 현지인 여직원 둘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보아하니 그들도 무료히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내가 가져간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영어가 유창한 레에나라는 여직원은 여러 가지 현지의 유익한 정보들을 들려준다. 쇼핑은 어디가 싸고 한국 관광객들이 주로 사 가는 선물은 무엇이며 음식점은 어디가 좋고 등등. 그리고 한국인 사장한테 물어보기 곤란해서인가?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댄다. 내 짧은 영어실력으로 제대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포함해서.
오늘 내가 리마공항에서의 당한 황당한 사건에 대해 불평을 했더니 LATAM은 국영 항공이라 비싸 현지인들도 잘 안 탄단다. 그제야 비행기에 승객을 1/10도 못 채운 듯 텅텅 비어 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30~40분간 신나게(?) 떠들고 나니 긴장도 좀 풀리고 엉망으로 구겨졌던 기분도 훨씬 나아진다.
비도 계속 내리고 더 돌아다니고 싶은 기분도 아니어서 숙소로 돌아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은 고산병 증세가 없다. 미리 타이레놀을 먹어두긴 했지만. 저녁 시간에 숙소 식당에서 햇반에 라면을 끓여 진수성찬인 양 맛있게 먹고 있는데 나이가 꽤 든 동양인 남자가 다가와 일본 말로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더니 잠시 실망한 눈치다. 통성명을 하긴 했지만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 금방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이 남자는 내 옆에서 저녁 식사라며 빵 한 조각과 비스킷 몇 개를 꺼내 끼적끼적 코카 차와 함께 먹으면서 자꾸 내 라면에 눈길을 주는 것만 같다. 보기가 딱해(?) 혹시 라면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얼굴색이 확 달라진다. 방에 들어가 컵라면 한 개를 가져다줬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다닥 먹고 국물까지 깨끗이 비운다. 근 열흘 만에 먹는 라면이란다.
홋카이도에서 왔다는 이 남자는 나보다 몇 살 아래인 69살이라는데 순전히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한 달째 남미에 와 있단다. 70이 다 된 나이에 남미에 와서 스페인어 공부라? 스페인어를 배우는 동기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열정만은 대단하다. 그는 옆자리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있는 젊은 스페인 부부의 대화에까지 넉살 좋게 끼어들어 스페인어 실전 연습을 해 된다. 그의 스페인어 실력을 들어보니 겨우 몇 마디 단어만 나열하는 왕초보 수준이라 내 스페인어 실력과 오십 보 백 보다. 그런데 그의 영어 구사력은 스페인어 실력보다도 훨씬 못하다.
우리 네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9시가 지날 무렵까지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우리가 아는 모든 단어와 손짓, 표정을 섞어가며 기묘한 대화를 이어간다.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요? 쓸데없는 이야기들. 알아듣냐고요? 못 알아들으면 어때서. 어쨌든 우리의 장시간의 희한한 국제급(?) 대화는 내겐 더할 수 없는 약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어 시차를 빨리 극복할 수 있었고 온종일 불쾌했던 기분도 웬만큼 털어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