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여행자의 칸쿤에서의 하루
카르멘 해변(Playa del Carmen)을 둘러 칸쿤(Cancun)으로 향하는 4차선 도로는 넓게 잘 포장되어 있다. 도로변의 시원하게 뻗은 야자수나무들도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원주민 말로 '뱀의 둥지'란 뜻의 칸쿤은 1970년에만 해도 주민이라고는 단 3명에 불과한 유카탄반도 끝머리에 위치한 조그만 어촌섬이었다.
그런데 카리브해 7자형의 태고의 하얀 해변가에 멕시코연방정부가 1974년 관광리조트를 조성한 이후 칸쿤은 세계적인 고급휴양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일 년 4계절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열대기후에 원시 그대로의 새하얀 산호모래 해변가, 당일 관광이 가능한 인근의 유명 마야유적들, 미국의 주요 도시들과 불과 4시간의 비행거리 등 천혜의 자연적 지리적 조건들이 미국의 부자들과 각국의 돈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호텔지구(Zona Hotelera) 내의 <모두 포함(All inclusive)> 호텔들은 하루 밤 숙박료가 최하 수백 불에서 천불이 넘고 주변의 값비싼 위락시설까지 더하여 먹고 마시고 노는데 아낌없이 돈들을 쓰게 한다. 한 때는 한국의 신혼부부들에게 까지 널리 알려져 2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에도 불구하고 칸쿤이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부자들이라면 왜 아니 이런 멋진 곳에 오지 않겠는가? 인간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기 위해 인간이 만든 지상낙원인데. 하지만 우리는 이 도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천혜의 바다에 접한다는 것 외에 라스 베가스와 뭐가 다를까?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돈 쓰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는 속물들의 휴양지(?) 일뿐. 수백 불짜리 호텔지구에 얼씬도 못해보는 우리의 알량한 처지를 이런 식의 심술(?)로 잠시 위로해 본다. 여기는 멕시코가 아닌 칸쿤이다. 우리는 멕시코를 떠나 칸쿤에 온 것이다.
Andrea와 Sandra라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은 당연히 호텔지구(Zona Hotelera)가 아닌 시내(El Centro)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방이 다섯 개나 있는 꽤 넓은 이층 집이다. 집안에 풀장도 있고 꽤 큰 정원도 있다. 우리가 이틀 동안 머문 2층방은 널찍하고 천정도 매우 높아 시원하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지만 풀장 옆의 식탁에 차려준다. 호텔지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 휴가 온 기분을 내보란 건가? 아침식탁에서 마주한 러시아서 온 모녀와 신나게(?) 서로의 여행담을 주고받는다.
칸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반. 우리는 넓은 이층 방에서 하룻밤을 푹 쉰 후 마지막 남은 소중한 하루를 카리브바다에 몸을 담그고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로 한다. 그래도 칸쿤에서 조금은 때가 덜 탔다는 <여인들의 섬(Isla Mujeres)>으로 가기 위해 페리부두인 후아레스 항(Puerto Juarez)으로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페리의 운항이 취소됐다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유를 물어본들 뭐 하리? 다시 인근의 쾌속선 부두로 이동하여 비싼 쾌속선을 탄다.
멀지 않은 거리의 <여인들의 섬>에 도착하니 과연 소문대로 관광지스럽다. 길 양옆으로 기념품가게와 식당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이 직접 누비고 다니는 골프카들도 보이고. 우리는 Andrea의 조언대로 하루에 미화 50불이나 하는 골프카를 빌리지 않고 북 해변가(Playa Norte)까지 천천히 걷기로 한다. 길가에 늘어선 기념품가게 숲을 지나 한 10분쯤 걸으니 야자수 우거진 해변이 나온다.
우리는 나름대로 사람들이 덜 붐비고 시야가 터인 비치를 찾아 파라솔과 선 베드를 빌리는데, 300페소(원화 20000원)란다. 하지만 나중에 비치뒤편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식대에서 300페소를 공제해 준단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양 옆으로 비키니차림의 팔등신 미인들이 쭉쭉 들어 누워 선텐을 하는 사이에 우리도 호기 있게(?) 누워 본다. 이제야 비로소 카리브해에 온 실감이 난다. 여름바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내 덕분(?)에 에버랜드에 있다는 카리비안 베이조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 진짜 카리브 바다에 몸을 담그게 되네.
바다색깔은 그야말로 온통 에메랄드빛, 아니 터키 옥색인가? 발아래의 새하얀 산호모래, 바다와 맞닫는 푸른 하늘, 정말 아름다운 색의 조화이다. 물은 따뜻하고 수심도 깊지 않다. 이보다 더 좋은 해변이야 더 있겠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처음 보는 최고의 비치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동안의 멕시코여행에서 생긴 피로와 땀을 깨끗이 씻어내며 한 나절을 원 없이 바다에서 즐긴다. 그런 다음 바로 뒤의 그럴듯한 해변가식당에서 라임(Lime) 수프와 세베테(Ceveche)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파라솔 자리값(300페소)까지 돌려받은 후 느긋하게 쉬다가 숙소로 돌아오는데 왠지 몸이 건질건질 다리 부분이 후끈거린다.
샤워를 하면서 보니 온몸이 벌겋고 특히 허벅지 부분이 후끈후끈한다. 불과 몇 시간 파라솔 그늘밑에 있을 거라고 선 크림을 제대로 안 바른 것이 화근이다. 밤새 몸이 근질거려 제대로 못 잔 일이야 불문가지이고 귀국해서도 한동안 고생한 일쯤이야 당연지사다.
우리는 다음날 오후 칸쿤공항에서 <여기는 멕시코가 아닌 미국땅(?)> 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3개나 되는 공항터미널에 쉬임 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 공항주차장을 꽉 메우고 있는 대형관광버스들. 출국장을 꽉 매운 승객들 사이에서 들리는 말은 오직 영어 하나. 2주간의 멕시코여행 중 거의 들어보지 못한 영어를 이곳에서 다 듣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칸쿤 정말 끝내주네! 치안 좋고 사람들 친절하고, 호텔시설 끝내주고, 미국의 안방이나 다름없어.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호화판 휴가를 즐겨 보겠어? 다음엔 좀 더 근사한 호텔로 또 와야지.'
우리는 그들에 섞여 뉴욕까지 가서 공항 근처의 후진 150불짜리 최저가 호텔에서 하룻밤을 더 잔 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무사히 귀국한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씩 35불짜리 민박집의 훈훈한 인심이 그립고, 무식하게 카리브해 햇살에 뜨겁게 달구어지던 <여인들의 섬>의 북 해변가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