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진짜 행복을 찾으라고 했다. 누가? 쇼펜하우어가. 사소로운 행복을 찾으라 했다. 이번엔 또 누구냐고? 아들러라는 의사가 그랬단다. 1800년대 사람들의 말들이 아직도 책으로 전해져 각 서점의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보면 이유까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분명 맞는 말 일 것이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있지만, 정확하게 쓸 자신은 없으므로 패스!) 그러니 H.O.T 의 행복도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겠지. (이건 그냥 한 때 H.O.T 팬으로서 욱여넣고 싶었다. FOREVER H.O.T)
행복은 늘 주위에 널려있다. 세 잎 클로버 사이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인데, 우리는 그동안 작다는 이유로, 자주 나에게 생기는 일이라는 익숙함에 행복이라 여기지 않고 남에게 자랑할 만한 커다랗고 희귀한 행복만이 진짜라고 여겨왔다.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으며 유교적 (서양사람도 옛날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사상과 현시대에 맞지 않는 생각에 그의 문장들에 줄을 치고 반박하는 메시지를 적으며 누가 시비를 걸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흥분해 읽었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찾아가 소주 한 잔 하자며 언쟁 좀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100% 내가 지겠지만.) 그렇게 시비 걸듯 읽던 중, 그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진짜 행복'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가 말하는 '진짜 행복'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타인에게 비굴하지 않는 당당함,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품격이다.
내가 우울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인지한 지는 사실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병원을 가지 않았고, 이 터널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살피고, 알아봐 주고, 손을 내밀어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외적인 타인에게 인정받고, 관심받고 싶은 관종의 마음이 더 컸다는 걸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외적요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모른 체 하기 바빴다. 쇼펜하우어의 직설적인 말들이 고개 돌리고, 눈감았던 마음에게 다가가 노크를 한다. 마음은 하는 수 없이 앞을 바라보며 눈을 슬며시 뜨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스스로의 살 수 있는 힘'
두 문장이 마음을 흔들자, 우울함이 내 몸을 뒤덮기 전 매일 수첩과 자기소개에 적었던 좌우명이 살짝 비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수천 번, 수만 번 쓰고 말하고, 생각했던 문장이 어느샌가 희미해져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반갑기까지 하다. '그래.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나를 위해'이 세 가지 모토가 새벽마다 되뇌는 나의 구호가 되었다.
오늘도 결국 잠을 못 이루고 설치다 2시 반에 깼다. 더 자야 한다는 압박감에 눈을 감고 이불을 감싸 안아보지만 눈을 뜨면 겨우 20~30분이 지나 가있다.
세시 반. 몸을 일으킨다. 이불을 개고, 화장실을 다녀와 물을 한잔 마신다. 그리곤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 일찍 자면 되지 뭐."
"오전에 병원에 가서 수면 유도제를 좀 더 달라고 하자."
"조용한 새벽이 길어졌으니 책도 읽고 글까지 쓸 수 있겠다."
조금은 인위적인 다짐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마음이 수줍게 꺼낸 말을 머리가 예리하게 캐치해서 대문짝만 하게 나의 생각 화면에 두꺼운 글씨로 띄워 알리는 중일뿐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나의 하루가, 비록 오늘 하루뿐일지라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다. 사춘기가 아직도 후유증이 있는지 부정적인 시각으로 삐딱하게 바라보던 세상이 이제 각도를 잡아가는 기분이랄까?
오늘 감사일기에는 나의 새벽이 길어짐에 감사. 그 시간을 누워있지 않고, 책과 글로 채워나간 나 자신을 칭찬해야겠다.
오늘도 행운 가득한 행복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