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후배는 영원한 후배

선배님, 술 사주세요.

by 선이

난 분명 감정이 메마른 로봇 같은 사람이었는데, 왜 반가이 사람들을 만나면 울컥해질까? 별이야기도 아닌 '네가 편해' '고마워'라는 말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마음을 흔드는지 모르겠다.


아빠의 시한부 선고를 들은 날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때는 나라도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했기에 그랬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임신과 출산의 반복이 금주를 계속 이어가게 했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는 여러 약들을 먹게 되면서 더 이상 내 인생에 술은 더 이상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 그 결심이 깨지고야 말았다. 1시간 전 모임에서 퀴즈 선물로 받은 귀한 안동소주를 당당하게 술 먹는 사람이 집에 없다며 다른 이에게 넘겨주자마자 일어난 일이라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술을 마실 생각이 아니었는데, 날 보자마자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언니의 미소 뒤로 지치고 힘든 모습에 나도 모르게 무너진 것이다.

아이 보느라 점심을 라면을 때웠다는 그녀의 말 끝에는 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간절하다는 게 느껴진다. 언니의 마음과 그간의 마음고생을 알기에 차마 술을 먹지 못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 길로 앞장서서 언니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없고 시원하게 뻥 뚫린 생맥주집을 찾아 나섰다.

"그래. 오늘은 마셔야겠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끝자락. 노상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부드러운 거품과 깔끔한 맥주를 넘길 때의 짜릿함이 그간의 긴장을 모두 가져간다. 이런 상쾌함이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마지막 장면에 언니도 분명 함께 있었으리라. 우리가 함께하는 곳엔 늘 맥주도 함께였으니. 아니, 어쩌면 반대로 맥주 있는 곳에 우리가 늘 있었다는 게 맞을지도.

오랜만에 만났던 탓에 요즘 근황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만났던 시간까지 역주행하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어느새 테이블엔 8잔의 빈 잔이 놓여있었고, 어두워진 주변은 가게들의 현란한 불빛이 메우고 있었다.


고1 순진하고 겁 많던 후배가 감히 그림자도 밟지 못했던 고3 대선배를 주말저녁에 불러내어 술을 얻어먹은 지 어느새 20년. 그사이에 우린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을 각자 겪으며 위로하고 응원하고 공감해 주며 그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시간이 강물 흐르듯이 쉼 없이 흐르더니 봄빛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찡그리고, 핸드폰을 멀리 두고 바라보는 노안이 생겨버린 중년이 되었지만, 우리가 만나는 순간만큼은 20대 풋풋한 새내기 그대로라 이 만남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마냥 어리고 철없는 후배를, 오늘도 소중한 친구이자 육아선배라며 늘 고맙고 미안하다고 글을 남긴다. 우리의 소중한 만남을 기록하고 남기고 싶다며 내가 떠난 자리와 맥주잔을 사진으로 남겨 sns에 올리는 소녀감성 가득한 이 언니를 나는 그동안 왜 나만큼이나 이성적이고 어려운 선배로 기억했을까. 역시나 사람은 오래 두고 보아야 하나보다.

친구도 아닌 선배를 부르는 배짱 좋은 후배는, 오늘도 20년 전 그날처럼 술을 얻어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만나자고 한 사람이 사는 게 국룰이지만, 언니는 나에게 할머니가 되어서도 술 사달라고 전화할 유일한 선배였으면 좋겠다는 핑계로 쿨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난다.

사실 언니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나도 언니와의 시간이 편하고, 귀하고, 좋고, 감사하며... 오래도록 이런 시간을 갖으며 언니가 그때 그 시절에 머물 수 있는 나의 타임머신으로 남아 있어 주길 바라기 때문에..... 는 너무 과하려나? 어쩔 수 없다. 한번 후배는 영원한 선배 딸랑이니까!!


어쨌든, 언니.
오늘도 덕분에 잘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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