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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Apr 24. 2024

What's Your Name?

2018년 9월 18일.


유치원에서 배추모종을 심었다.
화분에 하나씩..
자기가 심은 모종에는 잘 자라라고 이름도 지어주고 물도 주고 했단다.
대부분 친구들은 '미니' '귀요미' '냠냠' '예쁘니' '샤이니'.. 참으로 아이들스럽게 지었다.
우리 아이들만 빼고.. ㅡㅡ;


큰아들이 지은 배추이름 '외계인', 둘째 아들이 지은 배추이름 '족발' (사진 찍은 자세 또한... 하아=3)

왜 니들만 이러니; 내가 뭘 잘못 가르친 거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혹시 둘이 같이 심었는지를 물었다. 각 반별로 한 거라 둘은 만난 적이 없다는데 이런 걸 보고 피는 물도다 진하다고 하는 걸까. 이름을 지은 이유도 참 남달랐다. 외계인은 배추모종이 외계인이 타는 우주선을 닮아서란다. 그래 그렇게 보일 수 있지. 패스  

"2호야, 너는 이름을 '족발'이라고 지었어?"

"배추 다 자라면 족발이랑 싸서 먹으려고. 맛있겠지, 엄마?"

"그건 배추가 아니고 상춘데?"

"아, 정말? 그럼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하니. 이미 선생님이 코팅까지 예쁘게 해 놓으셨던데...

아들아, 엄마야 말로 어떻게 하니. 당분간 유치원에 못 갈 것 같아.




 6년 전에 이렇게 일기를 써 놓았다. 글과 사진을 보니 그때의 내 기분이 떠오른다. 그 당시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에서는 홈페이지를 운영해서 학부모들은 모두 다 같이 갤러리에 올라온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얼굴만 다르고 똑같은 옷과 비슷한 표정, 그리고 같은 포즈로 한 명씩 찍은 갤러리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컷 있다. 화분과 나란히 찍고 싶었는지 개구리처럼 쪼그려 앉아서 시선을 모으는 사진.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우리 집 2호다. 하아.. 다들 이렇게 나와 같은 수순으로 우리 아이 사진을 보겠지. 그리곤 자연스럽게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이름표를 살피게 될 것이고, 그 밑에 적힌 배추의 이름도 무심결에 보게 될 거다. 별 기대 안 하고 읽은 배추이름에 한 번 웃고는 스치듯 드는 생각은 다들 똑같으리라.

"어? 이 아이 형이 우리 반이던가?"

"얘 형도 있는데, 이름이 뭐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윗반 아이들 사진을 찾을 거고, 이름을 몰라도 어디 가나 한눈에 형제임을 아는 외모로 1호를 모두가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곤 배추의 이름을 살펴보곤 또 한 번 빵 터져 오랜만에 눈물 났을 리 틀림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눈물을 닦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만 이러지 않겠구나. 유치원이 크지 않아 가족같이 서로 지내는 것이 이런 단점으로 작용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며 얼굴이 빨개지며 남편에게 우리 앞으로 유치원 행사는 가지 말자고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후끈 거린다.




  이 일기를 찾아본 데는 이유가 있다. 2호가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식물의 한살이'를 배운단다. 그래서 키우는 과정이 짧은 강낭콩을 심었다며 잘 자라게 해야 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키우는 과정을 기록해야 하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소파에 가방을 던지며 하는 이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나저나 아직도 강낭콩을 심고 각 가정으로 보내는구나. 이건 국민학교 때랑 똑같네.'

하며 반가운 마음에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의 화분을 받아 들었다. 화분을 꾸미고, 이름표를 만들어 꽂아 물을 흠뻑 뿌린 흙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아이에게 뭐라고 칭찬을 해 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2호가 먼저 말을 꺼낸다.

"엄마, 이름 봤어? 또 내가 엄청난 이름을 생각해 냈지."

그때까진 6년 전 그날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어제 먹은 점심도 생각이 안 나는데 6년 전 일이 바로 떠오르면 치매인 거다. 그러나 이름을 보는 순간, 떠올랐다. 그때의 창피함이.

"엄마, 봤어? 이름도?"

"하아... 너 유치원에서 배추 이름 지은 거 생각나?"

"그럼~ 그거 생각나서 얘도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데?"

"아.... 우리 2호 기억력 좋네."

"그렇지? 역시 난 천재야."

그래, 천재라 좋겠다. 어렸을 때 거금 들여 여행 다닌 것이나 생떼 부리며 힘들게 했던 것은 기억 하나도 못하면서 이런 건 왜 다 기억을 하는 건지.. 2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필터링을 해서 기억장치에 남기는 건지 의문스럽다. 그래도 이번엔 반친구들 앞에서 소개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다. 적어도 선생님은 모르실 것 같으니 그걸로 만족하자. 2호 말에 의하면 반 친구들한테는 쉬는 시간에 다 보여줬다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들의 부모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으니...


p.s. 아, 이름을 안 적었네. 이번 아이의 이름은 <삼겹살>이라 한다. 콩밥을 해서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어야 한대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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