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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May 31. 2024

전생에 우린 부부였을지도...

4시간 남짓 자고 일어났지만 피곤하지 않다. 기분 좋은 만남은 피곤도 이길 수 있나 보다. 아침부터 다정하고 신나 보이는 엄마를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도 장난도 치며 웃는 얼굴로 등교를 한다. 손을 흔들며 서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나누는 아침도 꽤나 괜찮구나. 매일 아침준비로 분주하던 때에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허공에 떠도는 목소리로만 아침인사를 나누었는데 오랜만에 아침 일찍 준비하니 상반되는 기분이다. 집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다.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고는 내 피부향과 잘 어울려졌는지 손목을 맡아보곤 씩 웃게 된다. 부드러운 장미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일까, 내 기분에 향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일까. 무엇이 먼저든 상관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하고 여유 있게 집을 나선다.

스타벅스에서 드라이브스루로 음료를 받아 운전하는 내 모습에서 프리랜서의 냄새가 난다.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중간중간 멈춘 차에서 밀린 연락을 확인하는 것이 드라마 속 실장님 혹은 대표나 된 기분이다.


그녀를 만나기 100m 전 기분 좋게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고 신호를 받아 좌회전을 한다. 주차장 앞. 셔터가 내려가 있다. 10시 오픈이라더니 10시 땡~! 해야 문을 열어줄 참인가? 그럼 강의 들으러 온사람은 강의 앞부분을 다 놓칠 수 있는데 그건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참 융통성 없다고 흉을 보며 단톡방에 현재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적어 공감글을 기대해 본다. 주차장 앞에서 비상등을 켜고 수다 떠는 재미도 나쁘지 않구나 하며 분주히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는데 뜬금없는 대화글이 하나 올라온다

"강의 11시예요?"

"아니요, 10시요."

당당하게 오픈시간에 강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쓰고는 인스타 탐방에 들어간다.

오늘 만날 선생님의 피드에는 아들의 수행평가 범위 실수를 통해 본인의 실수들을 떠올리며 화가 나는 상황을 진정하려는 모습을 우화 되어 글이 올라와있다. 스스로를 낮추며 이런 사람의 글을 읽으면 안 된다며 책 사지 말라는 역발상 홍보에 피식 웃음이 났다. 벌써 책 사서 다 읽고 사인 받으러 왔다고요.  댓글을 달려하는데 주차장의 문이 열린다. 9시 50분. 그래도 10분 전에는 문을 열어주어 강의에 늦지 않게 참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 줄을 섰으니 강의하는 3층 입구 가까이 차를 주차하고 자연스럽게 화장실에 가서 내 모습을 정돈하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눌 준비를 한다.




강의실 앞.

컴컴하다.

안내 직원이 없다.


뭐지? 이 세함은? 아까 11시 강의라는 말이 순간 뇌리를 스쳐 핸드폰을 꺼내 오늘 강의에 대한 안내 문자를 확인한다.


<시간 : 11시 ~ 12시 30분>


오 마이갓. 이를 어찌 하리오. 너무 선생님이 보고 싶었던 걸로 하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자연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장을 본다. 주차 시간이 길어져 추가 금액을 내야 할 테니 여기서 오늘 저녁 준비를 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줌마인가 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인스타를 켜 선생님의 피드를 찾아갔다.

@lee. eun.kyung.1221


"선생님, 저는 오늘 강의가 10 시인 줄 알고 오픈런했습니다.. 크크큭"

선생님의 실수 피드에 당당하게 나의 실수를 적으며 그녀와의 연결고리를 꾸역꾸역 만들어본다. 혹시나 기차 안에 계실 선생님이 이 댓글을 보고 피식 웃으신다면 작전 성공. 못 보셨더라도 뭐 어쩔 수 없다. 난 쿨한 제자니까.




우여곡절 끝에 강의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강의는 <자기주도 학습법>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선생님이 어제 올려놓은 나의 피드를 보셨는지 팩트 폭행을 쉼 없이 날리신다.


계획표는 아이가 선택한 것으로 하게 해야 한다, 분량이 적다고 화내면 안 된다.

동네 애들이 학원 다니며 진도 나간다고 덩달아 진도에 연연하지 말아라.

오늘의 할 일을 못했다고 화내지 말고 어떻게 해결할지 열린 질문을 하라.

국어는 독서다. 영어도 읽기다. 독해집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 서점에서 여름방학때 할 독해집을 보고 온 것을 아무에게도 말 안 했는데 CCTV를 내 몸에 장착하신 걸까? 어제 공부량이 1시간도 채 안된다며 2시간으로 늘려오라고 소리치던 내 글을 읽으셨을까?

매번 길을 지나다 만나는 아이 친구들 엄마에게 학원에서 어떤 교재로 어디까지 나갔는지 물어본 나를 보신 적이 있으신 건가?


강연 속 엄마 멘트와 표정에서 내가 보였다. 아니, 그냥 나 자체였다. 잘은 모르지만 빙의라는 게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매번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읽으면서 아는 내용이었음에도 잘 안 지켜지는 것들만 쏙쏙 뽑아 재연하시는 그 연기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정도면 빙의를 넘어서 돗자리 까셔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우린 전생에 천생연분이었기에 아직도 약하게나마 텔레파시가 통하고 있는 걸지도. 그렇다면 나는 남편 해야지. 설거지는 하기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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