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작가가 되었다.

by 선이

삐비비비빅.
6시 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D-day다. 릴스 촬영 날.

며칠 전부터 시험공부하듯 질문지를 보며 대본을 만들고, 고치고, 중얼거리며 외워왔다.
드디어 그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 온거다.

지방러는 오후 촬영임에도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귀찮지도, 피곤하지도 않다.
서울.

결혼 전까지 30년을 살았던 내 고향이자 아지트.
혼자 가는 서울이란 사실만으로 벌써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오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도 잡았고, 촬영장 근처의 추억 장소에도 들를 계획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6시가 아니라 3시였다 해도 나는 기꺼이 눈을 떴을 것이다.

식구들 중 가장 먼저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눈 비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 다녀올게. 너희들도 학교 잘 다녀와.”

요즘 들어 가장 밝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바람처럼 휙, 집을 나섰다.




기차역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열차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펼쳤다. 질문지를 중얼거리며 프리랜서라도 된 양 의기양양했다.

옆자리의 아저씨가 내 화면을 흘끔 본다. 노트북을 두드리며 중얼거리는 내가 조금은 있어 보였을까.

괜히 그 시선을 즐기며 1시간의 기차여행을 보냈다.

어느새 용산역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들린다.
여전히 복잡하고 시끄러운 공기가 답답하지만 싫지 않았다. 정신없는 사람들 틈에서 요리조리 길을 찾아가는 내 모습에 ‘아직 완전한 촌년은 아니구나’ 싶어 피식 웃었다.

촬영장소는 고등학교 앞 평범한 빌라 2층. 출판사 에디터님과 마케터님을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1여년간 톡과 메일로만 알고 지내던 분들이 실물로 등장하니 이상하고 반가웠다. 온라인 캐릭터가 현실에 나타난 느낌이랄까. 서로 어색하지 않은 척,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촬영팀도 도착. 당연히 이분들 역시 모두 초면이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서로 눈치를 보는 다섯 명이 모였다. 그 침묵이 못 견디게 어색해서 나는 오랜만에 ‘전직 주임교사’ 모드로 애매한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촬영팀은 카메라를 세팅했고, 출판사팀은 대본과 프롬프터를 점검했다.

“우리는 다 준비됐어요. 이제 작가님만 잘하시면 돼요.”
말은 없지만 그런 분위기였다.

눈치 빠르게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정면에는 카메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작고 까만 렌즈가 나에게 애쓴다며 조용히 웃는 것 같았다.

“대본 그대로 읊지 않으셔도 돼요.”
“자연스럽게 말씀만 해주세요.”
“저희가 알아서 편집해드릴게요.”

괜찮다는데도,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20여 년을 말을 업으로 했던 나인데, 말이 안 나왔다. 카메라는 작았지만, 존재감은 강했다. 말이 꼬이기 시작한다. 표정이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분명 에어컨을 켰는데 식은땀이 났다.

결국 NG.

“다시 처음부터 해도 될까요?”

“아뇨, 이어서 하시면 돼요.”

“어디서부터 틀렸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하고 싶은 말부터 하시면 돼요.
저희가 알아서 잘 편집할게요.”

그게 더 싫은데요…
처음부터 딱, 맞춰야 편한 파워 J의 마음은 카메라 앞에서 파워 P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총 8개의 질문. 2시간 예정이던 촬영은 1시간 만에 끝났다. 잘한 건지, 아닌 건지 확신은 없었다.

촬영팀은 “잘하셨어요”라 했고, 출판사 팀은 “완벽했어요”라 말했다.

그런데 나는 첫 번째 질문에 대답이 엉켰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노트북은 꺼내지 않았다. 대본도, 메모장도, 아무것도.

그저 창밖만 봤다. 내 이야기를 말로 다시 꺼낸 하루.

카메라 앞에서 ‘작가’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었던 오늘.

나는 잘했을까? 그 질문에 아직은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마음 한편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도 해냈잖아.”

말을 업으로 했던 나는, 오늘 처음 ‘나의 말’을 업으로 했다.

카메라 앞에 앉아 내 책을, 내 이야기를 나 스스로 말한 날.


이것이 내가 작가로 살아낸 하루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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