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 장갑 앞에서 소리를 질렀을까

by 선이

며칠 전, 싱크대 하수구가 막혔다.
집 안에서 가장 평화로워야 할 공간에서 가장 성가신 일이 벌어졌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발바닥이 축축했다.
고개를 숙이니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흘려놓은 것도 아닌데 물은 제 할 일을 하듯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이럴 땐 생각할 여지가 없다.
걸레를 꺼내고, 고무장갑을 끼고, 배수구를 열어본다.




결국 새 고무장갑과 배수구 용품을 사야 했다.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늘 그렇듯 무채색.
튀지 않는 색, 말 걸지 않는 색.
집 안에서만큼은 시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옷장을 열어도 검정, 흰색, 네이비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색이 싫다기보다는 익숙한 색이 편한 쪽에 가깝다.
생활용품도 마찬가지다.
고무장갑은 고무장갑이면 됐다.

그렇게 새 장갑을 싱크대에 걸어두었을 때 남편이 멈춰 섰다.

“어? 나 따뜻한 고무장갑 있는데.”

나는 그 말에서 이미 예감을 했다.

이 뒤에 나올 이야기가 내가 상상하는 방향은 아니라는 걸.

“샀어? 말하지 그랬어.”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베란다로 향했다.
본인은 ‘보물창고’라 부르지만 사실은 세차 용품과 공구들이 무질서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무언가를 찾을 때의 남편은 늘 진지하다.
상자를 열고, 다시 닫고,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다.

후,

그가 들고 나온 물건을 보는 순간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어? 잠깐만.

제발,
내가 색을 잘못 본 거라고 해주세요.
조명이 이상한 거라고.
아니면 내가 피곤한 거라고.

아니면 노안이라 색맹이 같이 온거라고.

아니면 또 뭐가 있지? 뭐든 그 뭐든 그 이유라고.


그의 손에는 다홍빛 고무장갑이 들려 있었다.
손가락 모양이 또렷하게 드러난, 너무도 분명한 다홍빛.

“이게 안에 기모로 돼 있어서 진짜 따뜻해.

뜨거운 물로 기름기 설거지할 때 최고야.”

그는 아주 합리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마치 이 색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결과라는 듯이.

“아아악… 그게 뭐야!!!”

“왜? 예쁘잖아.”

그는 진심이었다.
“이거 인싸템이야. 특별히 자기니까 주는 거야.”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은 세차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걸.

세차를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 대하는 사람이라는 걸.

세차에는 고무장갑이 필수고, 그 고무장갑에도 유행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배웠다.

다홍빛에, 고양이 포인트가 살짝 들어간, 속이 기모로 된 고무장갑.

남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배바지 보라색 판다 잠옷 차림으로 직접 장갑을 끼더니 싱크대 앞에 섰다.

“봐. 설거지 각 딱 나오지?”

그 순간, 둘째가 말했다.

“엄마, 아빠 오늘 유튜브 찍어?”

그 한마디에
큰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나는 소리쳤고, 남편은 억울해했고,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인싸템을 알아봐 주지 않아 서운한 사람과
그 인싸템이 우리 집 주방에 등장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꼽 잡고 웃고 있는 아이들.

우리 부부는 이렇게 다른 맛에 사는지도...


주말 아침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예고 없이, 조금은 시끄럽게.

잠시 후,
나는 다홍빛 고무장갑을 싱크대 옆에 걸어두었다.
손이 가지 않아 쓰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치우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집은 처음부터
무채색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주말 아침.
오늘도 우리 집은 조용하지 않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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