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사랑해

동병상련 혹은 죽마고우

by 선이

"야, 이 나쁜 x. 너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한밤 중에 Y에게 전화를 걸어 무작정 쏘아댔다. 영문을 모르고 욕을 먹은 그녀는 나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눈치채고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같이 울기 시작한다.

"그래. 울어. 너도 좀 울라고. (훌쩍) 울면서 나처럼 전화하라고~!! (훌쩍) 왜 연락 안 하냐고, 나쁜 계집애!!"

"왜 그래. 선이야. 응? 왜에~ 무슨 일인데 울어?"

"나 어제부터 우울증 약 한 단계 올려서 먹었는데, 먹자마자 너무 힘들어. 네가 약 먹으면 괜찮아진다며. 약 단계 올리고 나서 많이 나아졌다며. 그거 다 거짓말이었잖아. 이거 단계 올릴 때마다 적응하느라 힘든 거였잖아. 이거 단계 올린다고 더 나아지는 게 아니었는데 왜 나 속였어? 네가 더 힘들어지는 거였는데... 대체 넌 왜 이걸 혼자 버티고 있는 거야. 왜 힘들다고 말을 안 하냐고~!! 힘들잖아, 아프잖아, 근데 왜 다 괜찮대!!"

술에 취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 마냥 약에 취해 울며 Y에게 그동안 못했던 속마음을 쏟아냈다. 엄마와의 이별, 이혼소송, 사업문제, 육아..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는 중인 Y는 항상 약을 먹고 있으니 괜찮다며, 오히려 아들 둘을 타지에서 키우는 나를 걱정하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한다. 매 번 괜찮다는 거짓말쟁이. 난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챙기지 않은 바보 멍청이다.


"넌 대체 이걸 어떻게 참은 거야. 어떻게 버틴 거야... 으아아아앙"




웃으며 말하는 게 버릇이 될 정도로 싫은 소리는 절대 못하는 천성이 착한 천사 Y. 그녀는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지만, 상대를 배려하느라 언제나 상처받고 힘든 자신을 뒷전으로 숨기는 또 다른 바보 멍청이다. 웬만한 건 다 괜찮다는 이 미련곰탱이는 20대 중반에 알게 된 내 친구이자 동지다. (그래서 우린 둘 다 어리석은가 보다.)

우린 직장동료로 만났다. 경력이 많아 내가 선배였지만, 우린 여러 가지로 잘 맞아 친구로 지냈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늘 함께였다. 주위사람들이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하고, 그러니 연애를 못하는 거라고 핀잔을 줘도 우리는 함께 하는 순간이 너무 좋았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생일이 일주일 차이가 나는데, 먼저 태어난 Y에게 나는 막무가내로 내가 언니라며 큰소리쳤고, 결국 결혼을 먼저 하면서 인생 선배 언니가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이젠 Y가 우울증 선배가 되어 나에게 많은 조언과 위로를 해준다.

넌 또 나랑 전화를 끊고 내 걱정하며 술을 마셨겠지...

"난 지금 진짜 괜찮아졌어. 행복하다니까?"

"또 거짓말한다."

"아니야. 진짜야. 00가 말이 트여서 요즘 얼마나 예쁜데. 얘 키우느라 정신없는데 이뻐 죽겠다."

난 또 그 말에 속아서 다행이라며 마음이 짐을 조금 내려놓는다. 내가 걱정할까 봐 늘 이런저런 좋았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나를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Y. 오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녀가 한다.

"너한테 맞는 약 찾으면 그때부터는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버텨봐.

힘들면 나한테 전화해서 지금처럼 다 토해내고. 자꾸 마음속에 담아두니까 병 되는 거야."

"그걸 아는 애가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한 건데?"

"야, 나도 사느라 바쁘거든? 한가롭게 너랑 통화할 틈이 없다. 네가 유치원생 딸 둔 직장맘의 삶을 알기나 해?"

"어쭈~ 지금 유치원생 하나 키우면서 힘들다는 거야? 너 내가 얘기했지. 쌍둥이보다 연년생 형제가 더 힘들다고. 거기다 1호는 이제 사춘기거든? 어디서 육아 선배한테 아는 척이야?"

"넌 아동학 학사지만, 나는 석사라는 걸 잊지 마. 난 아직도 아이들 상담하고 치료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모르긴 뭘 모르냐? "

"전공 다 필요 없어. 이론과 현실은 다르고, 교사와 엄마는 또 다르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래?"


우린 또 누가 선배고, 누가 더 힘든지 우열을 가르는 시답지 않은 말싸움을 하면서 웃어넘긴다. 서로의 아이에 대해 묻고, 조언하며 평범한 일상 대화로 1시간을 통화를 하고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Y와의 통화는 항상 진지함이 5분을 넘기지 못한다. 진지함이 오래가면 서로 오랫동안 힘든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린 늘 허튼소리로 넘긴다.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은 전달이 되는 오랜 친구고 동지니까.


"나 이제 친구 너 하나밖에 안 남았다. 알지? 넌 무조건 행복해야 해.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

우리 애들 조금만 더 크면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놀러 다니자. 그때까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놓을게. 그러니까 밥도 잘 챙겨 먹고, 힘들면 연락해. 난 이제 내 삶에 적응도 하고 안정도 찾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서로 몸도 마음도 건강하자. 사랑해, 내 친구 ♡"

"나도 진짜 괜찮아. 알잖아. 약 먹으면 잠깐 이랬다가 마는 거. 난 진짜 진짜 힘든 것도 없고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마시게. 너나 힘들면 연락 좀 해! 제발!!! 쫌!!!!!! 알았지? 우리 놀러 다니는 그날까지 잘 버티고, 이겨내 보자. 나도 많이 사랑한다, 친구야 ♡♡"

"응, 알겠어. 잘 자, 내 꿈 꾸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아니야,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웃기시네.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너야말로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잖아."

"야야, 우리 오빠가 작작하래. 짜증난대 ㅋㅋㅋ"

"나한테 질투하는 거야? 우리가 더 오래된 사이라고 얘기 좀 해줘"

"시끄럽고 잠이나 자라는데? 질투 맞나 봐 ㅋㅋㅋ"

"ㅋㅋㅋㅋ 그래도 사랑해"

"나도 ♥"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 밖을 내다본다.

오랜만에 보는 밤하늘에 뜬 손톱달이 오늘따라 유독 예쁘다.

'늘 고맙고 미안한 Y가 누구보다 행복하길...'

달에게 내 마음을, 내 소원을 보냈다.

내 마음은 Y에게로, 내 소원은 달님에게로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눈을 감는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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