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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Apr 27. 2024

아빠가 남긴 추억의 유산

라면 레시피

“저 자식 저러는 거, 지 아비어미가 알아야 하는데... 쯧쯧쯧.”     

오늘도 아빠는 운전을 하며 창 밖에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라 걱정, 미래 걱정을 하신다. 그 유명한 58년 개띠의 대명사 우리 아빠는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다. 남자와 여자의 할 일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본인의 말이 곧 법인, 집안의 기둥이시기도 하다. 조선시대 양반 같은 아빠는 길을 가다가 애정표현을 하고 있는 연인을 보면 눈을 흘기며 욕을 하기 일쑤고, TV 속 여자 연예인이 목소리가 크면 아무리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채널을 돌리신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말과 행동이 다른 집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에 아빠의 모습의 정석인 줄 알았기에 정류장에 서 있는 커플이, TV 속 연예인이 법을 위반한 것인 줄만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양반집 맏딸인 나는, 연애를 하며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짧은 치마에 큰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21 세기 신여성이 되었다.

 “아빠, 그럴 거면 그냥 머리를 길러서 서당을 들어가. 그 누구냐? 딸이 트롯 하는 훈장님 있잖아. 그 아저씨가 생각하는 게 아빠랑 똑같더라.”

 딸의 핀잔에 아빠는 듣기 싫다는 표현을 담배 피우러 나가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도 그랬다. 아버님과 아빠는 우리 아이가 아들이어서 너무 좋다며 ‘아들과 목욕탕에 함께 들어갈 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라고 굳이 표현하며 그 자랑스러운 손자를 품고 있는 예민한 상태인 임신모 앞에서 맞장구를 치며 웃으셨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딸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 손자의 초음파 사진만 바라보는 두 분에게 너무나 서운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그때의 섭섭함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례행사로 얘기하는 건 비밀이다.)  

  

이 외에도 여자라서 서운한 일은 살아오면서 많이 느꼈다. 그때마다 표현하지 못하고 밤마다 일기에 적고, 베개에 눈물을 적시며 잠이 들곤 했다. 이 정도면 아빠가 미울 법도 한데, 오히려 나는 엄마보다는 아빠가 좋았다. 서운해하는 것만큼 감동이나 즐겁게 해 주는 일도 아빠의 몫이었다. 요즘말로 츤데레 스타일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빠에게 든 서운함을 싹 사라지게 하는 음식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말마다 끓여주는 ‘아빠표 라면’이다. 엄마가 일이 생겨 집에 없을 때나, 늦잠을 자고 일어난 주말 아침이면 딸이 해주는 음식이 못 미더워 끓여주시던 ‘아빠표 라면’은 어느새 우리 집의 대표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아빠표 라면은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지만, 가끔씩 생각날 정도로 그 맛이 잊히지 않는다.     

아빠표 라면은 우유가 들어가는 게 큰 포인트다. ‘우유’라는 말에 우유 비린내를 생각하고 인상을 찌푸리시는 분들이 분명 있을 테지만, 내가 전하는 레시피를 보고 꼭! 한번 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당신이 생각하는 비릿하고 느끼한 라면인지 확인도 할 겸 말이다. 기왕이면 술을 거하게 마신 다음날 해장으로 먹어봤으면 좋겠다. 여느 해장국보다 속을 풀어줄 테니 말이다.   

아빠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아빠표 우유 라면>

  * 준비물: 진라면 (매운맛) 1개, 물 400ml, 냄비, 우유 100ml, 계란 1개,

          청양고추, 콩나물(선택사항)     

  *조리 방법 (1인분 기준)     

   1. 진라면 매운맛을 준비한다. (꼭 이거여야 한다!)

   2. 냄비에 물 400ml를 넣고 끓인다.

   3. 물이 끓으면 면과 야채 건더기를 넣는다.

   4. 면이 반쯤 익으면 우유 100ml와 분말수프를 넣고 더 끓인다.

      (좀 더 얼큰하게 먹고 싶으면, 이때 청양고추, 콩나물을 조금 넣는다.)

   5. 라면이 다 익으면 계란을 한 개 깨트려 넣고, 라면의 온기로 익힌다.

      (단, 계란은 휘젓지 말 것!!)  

   


 레시피대로 끓이면 묽은 로제 같은 느낌의 라면이 완성된다. 먹는 방법은 따로 없지만, 나는 국물을 먼저 한 입 후루룩 마시고, 계란을 찾을 겸 라면을 휘휘 저어 계란 흰자와 라면 면발을 함께 먹는 걸로 시작을 한다.     

“캬~ 이 맛이지”

“요즘 우유 넣은 라면이 종종 있기는 하는데, 이 맛이 안 나더라.”

“당연하지. 아빠만의 특급 비율이 있거든.”

“내가 이럴 줄 알고 어제 술을 많이 마셨지. 크크큭”

“너 이 자식! 어제 또 술 마시고 들어왔어?”

“괜찮아. 난 아빠 닮아서 잘 안 취해.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며 아빠는 내심 뿌듯해하시며 국물을 한 국자씩 더 담아주시곤 했다. 말로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던 옛날 남자는 그렇게 라면 레시피를 전수하고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그 후로 평소 입맛이 정확하신 분이라 엄마의 음식에 간 맞추기 담당이었던 아빠의 역할은 이젠 남동생이 이어받아 명절 때마다 음식이 짜니, 싱겁니 하며 아빠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동생이라 그런지 아빠보다 더 꼴 보기 싫다.) 다행히도 올케가 우리 집 식구가 되면서 그의 지적질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동생을 볼 때면 아빠의 모습이 수시로 보인다.     

“얘들아~ 오늘 아침 라면 먹을 사람?”

“저요!”

“아빠 나도!”

“삼촌, 저는 라면 좋아하는데... 그거 매운 거예요? 매운 건 못 먹는데..”

“에이~ 삼촌을 뭘로 보고! 하나도 안 매워.”

“진짜요? 그럼 저도 먹을래요?”     

남동생은 아이들을 불러놓고 “오늘은 내가 우유라면 요리사!”를 외치며 긴 요리용 나무젓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포즈를 취한다.     

“아하하하! 삼촌 진짜 웃기지?”

“아빠, 앞치마도 했네?”

“그런데 삼촌, 우유라면이 뭐예요?”

“일단 기다려봐. 엄청 맛있는 라면이야. 먹고 나서 또 해달라고 하면 안 돼. 알았지?”     

아이들의 부푼 기대를 받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동생은 아빠의 레시피로 아이들을 위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짜잔~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이게 우유 라면이에요?”

“로제 라면이다!!”

“아니야, 로제하고 달라. 삼촌 거는 우유라면 이래도!”

“먹어봐도 돼요?”

“무슨 맛일지 빨리 먹어보고 싶어요.”

“자~ 먹고 싶은 사람은 그릇을 들고 삼촌 옆에 줄 서세요~!!”     

아이들은 본인 그릇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서서 라면을 배식받고는 자리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우와~ 맛있다.”

“우유 맛이 날 줄 알았는데, 안 나지.”

“응. 엄청 신기하다. 맵지도 않아.”

“삼촌 이거 우유랑 라면만 넣은 거예요?”

“그건 비밀~!”     

아이들의 즐거운 대화와 웃음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미소 속에는 아빠의 따뜻한 모습이 스며 있었다. 추억이 쌓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아빠의 존재감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파란 하늘에 커다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봄의 주말. 아빠도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며 껄껄껄 웃으시겠지? 아니면 여자가 몇인데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한테 요리시켰다고 한 소리 하시려나?     

아빠, 덕분에 아빠와의 추억도 떠오르고, 아이들과 새로운 추억도 만들었어요. 아빠와 함께하진 못했지만, 아빠와 함께하는 기분이 들어 더욱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추억의 음식, 우유진라면을 전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커서 라면을 혼자 끓여 먹을 수 있을 시기가 되면, 할아버지가 만든 레시피라고 강조하며 우리 집 가보를 알려줄게요. 그리고 아빠한테 가서 직접 끓여 드릴 테니 꼭! 평가해 주세요. 많이 많이 보고 싶어요, 아빠. 그리고 사랑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다.-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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