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바흐의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그리고 건축에의 단상들
이 글은 H. 롬바흐의 저서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2001, 서광사)를 바탕으로 <<건축평단>>에 게재한 글입니다.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희로애락이 오가는 삶의 순간순간 내려앉는 감각의 압도적 소용돌이는 언어의 영역을 한 손에 움켜쥐며 세계를 장악한다. 언어는 어느 생활공동체의 고양된 삶의 가시적인 상징적 형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언어의 길이 가로막히는 경계를 경험할 때, 말의 문이 막힌다. 닫힌 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만히 기운을 낮추고 나직이 긴 숨을 내쉬어본다. 감각 앞에 무력했던 언어가 조금씩 다시 꿈틀거림을 느낀다. 그렇게 몸의 세계는 열리고 닫히며,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는 언어의 형상과 생동을 살아간다.
언어는 삶- 그 아래의 수많은 것을 머금은 채 삶의 윤곽으로 표면에 머문다. 형상 아래에 있는 것들은 때론 흩어지고 때론 뭉친다. 때론 소용돌이치고 때론 휩쓸려간다. 그렇게 흐른다. 흐름 가운데에서 덩이진 몇몇을 건져 올린다. 건져 올린 것들은 눈앞에 보인다. 보이는 것들은 반짝인다. 정리된 것들, 질서 있는 것들, 그들은 그렇게 밝음 속에 몸을 세우고 집을 짓는다. 보임, 그 밖의 존재들은 아직 어둡다.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Welt und Gegenwelt)』(1983)는 이와 같은 삶에서의 밝음과 어두움의 세계에 ‘신화’로 다가간다. 저자 하인리히 롬바흐(1923~2004)는 194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막스 뮐러 교수의 지도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교에서 1955년 교수자격을 취득한 후,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 정교수로 재직하였다. 롬바흐는 “선험적 현상학”의 후설(E. Husserl 1859~1939)과 “기초존재론적인 현상학”의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에 이어 “구조존재론적 현상학”으로 프라이부르크 현상학파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인 존재의 근원성을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었다고 알려진 롬바흐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실체, 체계, 구조(Substanz, System, Struktur)』(1965/1966), 『구조존재론(Strukturontologie)』(1971), 『정신의 삶(Leben des Geistes)』(1977), 『현재적 의식의 현상학(Phenomenologie des gegenw rtigen Bewu tseins)』(1980), 『구조인간학(Strukturanthropologie)』(1987), 『사회적 삶의 현상학(Phenomenologie des sozialen Lebens)』(1994) 등이 있다.
롬바흐는 개념적 방식이 아닌 신이라는 직관적 형태의 이야기인 ‘신화’에 ‘학문’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삶의 근본형태를 자기 자신에게서 자아낼 수 없었을 때, 근본경험의 담지자 신은 인간다움의 척도를 밝혀 고양된 차원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학문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며 현실을 알게 하지만, 신화에는 학문이 온전히 그려내지 못하는 “보는 방식들, 감각 습관들, 삶의 지침들”, 그리고 “현실 전체에서, 한 지방에서, 온 얼개의 고양시키는 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근본 방식, 바로 신적인 것이 갖는 깊이와 충만함이 있다. 학문 구조가 갖는 틀과 한계를 넘어선다. 신화에는 진리를 통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
롬바흐는 이와 같은 믿음에 의지하여 자신이 서 있는 하나의 세계를 딛고, 다른 ‘세계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신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대화에는 전제가 있다. 인간 현존재가 “삶의 한 근본윤곽”(Grundriss, 평면도) 위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인간적일 수 있게끔 하는 가장 가깝고도 가장 작은 세계, 바로 그 시공간에 자신이 두 발을 디딘 채 살아가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나면 현존재 곁에 있는 다른 세계를 향하여 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갖추어진다.
롬바흐는 아폴론과 헤르메스를 이상에 기술한 바의 바탕이 되는 두 개의 커다란 상징으로 상정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세계는 아폴론 신이 지배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광채, 순수를 상징한다. 아폴론은 빛살의 상징인 화살을 쏘아 올린다. 어둠에 싸인 모든 것을 밝히고 불순을 거르며(파르노피오스) 병든 것을 치료하고 재앙을 막는(알렉시카코스) 빛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아폴론은, 그래서 ‘밝게 빛나는’이란 뜻을 가진 순수하고 성스러운 자, ‘포이보스’로 불리기도 한다. 드러냄의 신, 비은폐성의 신 아폴론은 암흑의 세계를 빛의 세계로 상승시키고 지배체계를 확립하며 척도를 관철하여 질서를 세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식과 드러냄의 모든 형식”, 이해가 일어난다.
이해를 지향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인식됨(Erkanntwerden)으로부터 해석된다. 모든 존재자는 본성적으로 시현이며 비은폐성의 한 영역인 일반적 존재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비은폐성은 존재의 의미이다. (중략) 이해의 세계는 낮의 세계이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해는 어떠한 영역 전체의 중심으로부터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롬바흐는 이러한 아폴론적 사유의 실제적 예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을 예로 든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후반,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서쪽 박공의 벽면 중앙에 아폴론을 세워놓았다. 아폴론은 박공의 삼각 벽면 중앙에 가장 높이 서서 중앙으로부터의 질서를 구축하고, 다른 모든 것에 각자의 자리를 열어준다. 각자의 위치에서 중앙에까지 이르는 거리에 따라 척도가 생겨난다. 간격, 척도, 조화, 통치권은 아폴론이 세운 고전적 질서의 기초가 된다. 롬바흐는 이 예에서처럼 한 존재를 중심으로부터 파악한다는 것이란 관점과 척도가 제시하는 근거와 근거제시(정초)를 바탕으로 다른 것을 움켜쥐고 장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붙들어 둠으로써 개념에서 더 넓은 개념으로, 밝은 것에서 더 밝은 것으로 나아간다. 이해의 학문, 해석학을 만든다.
반면, 아폴론의 이복동생이자 친구인 헤르메스는 길의 신이자 경계의 신이다. 헤르메스는 경계점 혹은 경계석을 의미하는 헤르마이에 낱말의 뿌리를 둔다. 여행자들이 표지석으로 쌓아둔 돌무더기인 헤르마이와 시간이 흐르며 헤르마이를 대체한 돌기둥 헤르마는 시원적 형태의 이정표로서 길을 알려주는 용도로 쓰였다. 길에는 길과 길 아닌 곳,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의 경계가 있다. 그렇게 방향을 제시한다. 헤르메스는 경계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가르고 잇는다.
헤르메스적 근본경험은 월경(越境)적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헤르메스적 경험과 함께 어떤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그것은 (중략) 새로운 지평들을 가진 한 세계이다. 기존의 것에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던, (중략) 자신의 고유한 지평에서야 비로소 빛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어둠으로부터 밝음을 구분하며 어둠을 헤치고 밝음을 들이는 신, 밝음과 어둠이 갖는 선명하고도 예리한 균열에 다리를 놓는 신,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게 인도하는 신, 그가 헤르메스이다. 나아가 헤르메스의 신을 입고 ‘학’ 너머에 은폐되어 있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 스스로 ‘학’을 형성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헤르메틱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롬바흐는 해석학(Hermeneutik)과 헤르메틱(Hermetik)을 구분한다. 두 낱말 모두 헤르메스에 기원을 둔다. 낱말의 뿌리에는 설명, 언표, 서술, 통역, 해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hermeneuein(라틴어 interpretari)이 있다. 뿌리는 같지만 해석학과 헤르메틱은 완전히 상반된 것으로 나타난다. 해석학이 “이해와 이해 가능성에 온 주의력을 [기울이는]” 개방성과 공공성, 섬(Stehen)과 지속(Bestehen)의 ‘학’이라면 헤르메틱은 비이해와 이해 불가능성, 폐쇄성과 고유성, 소멸과 무상함의 ‘학’이다. 롬바흐에 따르면, 헤르메스적 원리, 헤르메틱의 방식은 공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 진리를 공공의 공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비인격적인 ‘상호주관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폴론적 세계를 전제하는 인식의 모든 규정, 즉 근거와 원인에 따라 타당성, 일반성, 공공성의 측면에서 항상 증명이라는 확정성에 도달하는 방식은 헤르메스적 사유로 보자면 존재자의 외부에서 접근하는 특정한 관점들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헤르메스적 동행은 아폴론적 원리를 따르는 인식을 “세계에 대한 하나의 태도이고 하나의 문화형태이며, 역사적으로 제한되고 일방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보편적 진리에 의지하여 섣불리 계몽이라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헤르메스 신은 중심과 비중심의 경계에 서서 지배적 권력 구조로부터, “숨이 짧은 계몽주의의 소시민적 경솔”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
롬바흐는 위와 같이 아폴론의 세계와 헤르메스의 세계를 그린 다음, 미술, 시, 건축, 종교 등 여러 가지 구체적 사례를 적용하고 비평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가 적용한 다양한 사례 중 특별히 더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세계의 다수성과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고 교류하는 것에 관한 고찰이다. 뉴스에서든 직장에서든 친구 사이에서든 건축현장에서든 감상하는 예술작품에서든, 삶의 자리 곳곳에서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다”며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혀 머리를 감싸 쥐게 되는 일은 부지기수 아니었던가. 아타(我他)의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일상의 빅뱅’을 어떻게 하면 교류하는 대화의 새 물결로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
롬바흐는 세계의 다수성에 관한 사유를 펼치면서 파스칼과 라이프니츠를 인용한다. 먼저 우주적 세계의 다수성이 아닌, 긴장으로 가득 찬 인간 세계의 다수성을 주장한 파스칼이다. 서로 다른 마음과 오성과 감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구성원리와 근거제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개개인은 모두 각자가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파스칼을 인용하며 롬바흐는 같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같은 공동체에 살아감에도 서로 다른 인간 개개인이 갖는 세계의 각자성, 다시 말해 세계의 다수성을 주장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 또한 하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수의 질서를 넘어서는 질서는 어떻게 작동하며, 서로 다른 세계는 어떻게 교류하는 것일까.
롬바흐는 파스칼에 이어 한걸음 더 나아가 그만의 결론을 도출했던 라이프니츠를 인용한다. 라이프니츠는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파스칼의 사고를 넘어서서 단지 여러 세계를 구분하는 것만으로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존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라며 생각을 진전시킨다. 그리고 그는 세계들은 창문이 없어 서로 접촉할 수 없지만, 모든 세계는 유일한 진정한 세계에 비친 희미한 모습일 뿐일 수 있다며, 모든 것에서 유일한 존재인 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그러나 롬바흐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결론과는 상이한 모습으로 갈등과 반목, 오해와 대립이 만연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롬바흐는 현실은 라이프니츠의 조화모델보다 파스칼의 갈등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가 하나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주관이 달라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사물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체험하기 때문에 세계 자체가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의 차이는 그것을 차이로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넓다. 그렇다면 이렇게 깊고 넓은 세계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세계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롬바흐에 따르면, 그것의 첫 단계는 “헤르메스적 인간들이 서로를 헤르메스적으로 대하여 각자가 서로의 세계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유성을 인정한 다음 단계는 상대방이 그 자신의 고유성을 찾을 수 있도록 각자가 돕는 것이다.
완전한 헤르메스적 인간은 자기 자신이 세계구성에 단순히 매몰되어 있는 자가 아니라, 세계구성의 과정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이 과정을 자신과 타자에게서 생산적이고 해명된 방식으로 진흥시키는 자이다. 타자가 그 자신의 고유성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자만이 자기 자신의 고유성에 명료하고 순수한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다.
롬바흐는 현존재 각각 갖는 세계의 고유성을 지키면서도 타자 또한 그의 고유한 세계를 지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구별할 때 교류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의미의 결합은 결합이 아니라 구별에 있다. 각자의 고유세계가 온전히 보존되고 해소될 수 없는 차이가 만들어내는 긴장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가 형성될 때 인간들은 한 단계 고양되며 기존의 의미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또 하나의 의미세계를 공(共) 창조하게 된다. 이를 통해 세계 간의 교류가 가능하다. 그리고 세계들의 자립성에 관한 학, 헤르메틱은 다수의 사적 세계가 만들어내는 역사적 세계와 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사물과 장소와 지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횔덜린의 “알프스”가 이를 대변한다. (중략) 시나 건축물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개별 작품들도 그들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중략) 그들도 각기 고유한 세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개별 작품들이 세계를 기투하는 한, 그들은 더 이상 해석학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헤르메틱을 요구한다.
롬바흐에 따르면, 성당과 성, 수도원과 같은 건축, 하나 이상의 생활공동체가 모여 살아가는 도시, 한 편의 시, 한 점의 조각 작품과 그림이 각기 하나의 세계일 때,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의 표현이라 부를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이들은 한 역사적 지평 위에 드러나는 단순한 미학적 현상도 아니고, 어느 시인이나 화가 또는 작가의 개인적 발언도 아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이들은 각기 다른 생활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적인 어떤 삶을 안내하는 길을 펼침으로써 삶의 의미와 세계와의 연관을 열어 주는 커다란 가능성으로 실존하는 개별 세계이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날아오르는 신, 불가해의 밤을 맞는 신, 헤르메스는 우정 어린 논쟁, 정직한 의심, 진지한 불신을 끌어안는다. 롬바흐는 헤르메틱에 있어 논쟁과 의심과 불신은 서로 다른 삶의 근본경험이 관계 맺으면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말한다. 헤르메틱은 주어진 대로의 세계, 즉 완벽하지 않고 한계도 있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한다. 고유하면서도 열려 있는 헤르메스의 신을 입고 새로운 경험이 평화롭게 맺어지면 차이는 더 이상 깨어진 틈 멀리 있는 반대세계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균열과 흔들림의 불안정성은 그 자체로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긍정적인 것으로 존재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다.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의 부제는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Umedenken über die Wirklichkeit: Die philosophische Hermetik)’이다. 아폴론과 헤르메스는 생명 없는 것들이 가득 메운 현실에서 퇴락하는 정신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제의적 관습과 생활풍습, 축제와 삶을 살아가는 공동의 양식들, 자기 파악과 세계 파악에 있어서의 근본신념들”의 공속성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의 눈과 철학의 뿌리를 새롭게 한다.
롬바흐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대안적 사유, 헤르메틱은 고통스럽고 힘든, 갈등과 반목이 가득한 현실을 더욱 긍정적인 모습으로 개선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이는 단순한 의미에서 마음을 어루만지고 가라앉히는 위안의 차원을 넘어선다. 헤르메틱은 뛰어 넘어감과 비상(飛上)을 말한다. 헤르메틱이 제시하는 운동은 비강압적 도약으로, “옛 세계가 그의 옛 것과 가장 옛 것”, 즉 한 세계가 진정으로 그것의 고유한 본향으로 되돌아가도록 구원하고 구제하는 개선(Besserung)으로서의 긍정이며 해방이다. 직관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롬바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를 전개하고 서로를 연결하려는 시도로서 외면적 관용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향연(Mahl)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