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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건축

바우하우스

삶의 흔적으로서 건축 그리고 디자인

by 이민정

근대건축론 수업. 오늘은 바우하우스를 강의했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바우하우스의 설립에 도달하기까지 주차로 13차, 강의 횟수로 26회가 걸렸으니 회차에 비해 수백 년을 흘러 참 멀리도 왔다. 한 시대,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평생을 연구할 수 있기도 하지만, 학부생을 위한 총론 수업에서는 전체를 볼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큰 줄기를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이미 가지고 있을 대중 지식이 그려놓은 윤곽, 그 아래 혹은 이면의 것들을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 강의의 학문적 가치와 효용성을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아는 이야기에 간간이 섞여있는 숨겨진 이야기들은 때때로 흥미롭기도 하여, 나로서는 수면 부족으로 고통받는 20대 건축학도들이 잠의 세계로 떠나는 쾌속 여정을 좀 늦추거나, 운 좋으면 피할 수도 있다는 효과가 있다. 물론 아래에 전개하는 이야기들이 모두에게 숨겨진 이야기는 아닐 터. 또 다른 누군가에는 잠으로 가는 통로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14년 동안 존재했던 학교다. 1919년에서 1925년까지 독일 바이마르에서 운영되다가 1925년에서 독일 데사우로 이전했으며 이후 교육을 지속하다 나치 정권에 의해 1933년 폐교되었다. 운영 기간은 짧지만 근현대 디자인 역사에서 바우하우스의 위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건축과 관련하여 '바우하우스' 하면 제일 먼저 상기하는 것 중 하나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건물이 아닐까.


독일 데사우에 자리한 바우하우스 캠퍼스는 학습관과 학생 기숙사, 극장, 공용공간, 마이스터라는 호칭의 교수들이 거주한 주택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 건물은 단연 학습관이다.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유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위아래로 가늘고 긴 수평의 하얀 콘크리트가 선을 그린다. 모든 공간은 비대칭적으로 결합되는 가로 세로의 격자를 이루는 입체들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이 이루는 비례는 균형미가 돋보여서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마치 구성주의 회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일 데사우 소재 바우하우스

어디 이뿐인가. 바우하우스 캠퍼스 인근 작은 숲 속에 자리한 마이스터들을 위한 주택은 사회적으로 당면했던 주택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안으로서 당대의 미적 감수성마저 충만하다. 본관의 부속 건물인 마스터 하우스는 학교의 상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 주택들은 독특한 실험이었다. 장식 없이 평평한 수직 벽은 흰색 페인트로 도장했고 창틀이 없기에 건물의 선들은 더욱 예리하게 돋보인다. 콘크리트 차양과 평지붕이 수직벽과 이루어내는 입체들의 균형미는 당대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가치를 가감 없이 전달한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주택 아이소메트릭, 1925

그로피우스는 이들 마이스터 주택을 통해 현대의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현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는 "집의 전체 디자인을 해당 형태로 만드는 것은 살고, 자고, 목욕하고, 요리하고, 먹는 것과 같은 기능이다. (중략) 디자인은 디자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특성, 즉 건물이 완수해야 할 기능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생각했다. 이 주택들은 콘크리트 블록과 같은 대량 생산재를 사용하여 1년 만에 지어졌는데, 당시 그로피우스는 전후 주택 부족 문제를 염두에 두고 조립식 건축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있었다. 각각의 주택 구조는 "대규모의 건물 세트"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기본이 되는 입방체를 변형한다는 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로써 유사하면서도 서로 다른, 건축에서의 변화와 리듬을 감지할 수 있다. 길버트 루퍼(Gilbert Lupfer)와 파울 지겔(Paul Sigel)이 2004년 그들의 저서 <<그로피우스 1883-1969>>에서 지적하듯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를 위한 주택들은 그로피우스의 '건물 블록 원리(Baukasten Im Großen)'를 실용적으로 실험해보는 역할을 수행했다. 건물 블록 원리는 거주자의 수와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을 위한 기계'를 조립할 수 있게 함을 목적으로 했다." 그로피우스는 "이 주택 모두는 동일하면서도 서로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다. 곱셈을 통한 단순화는 더 빠르고 더 저렴한 구축을 뜻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데사우에 바우하우스 캠퍼스가 새롭게 조성되어 상기와 같은 근대 건축 실험들을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바우하우스 설립에서부터 여러 차례에 걸친 변화의 지점이 존재했다. 바우하우스가 거친 전환점들은 당시 독일 국내외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독일 바이마르에서의 초기 바우하우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 후 도이치 제국이 붕괴되었다. 그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학교가 병합되면서 바이마르에서 '국립 하우하우스 바이마르'가 설립되었다. 데사우에서의 바우하우스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바이마르에서의 바우하우스 초기 교육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장인과 예술가 사이에 오만한 장벽을 만드는 계층의 구분이 없는 새로운 제조자 커뮤니티 (발터 그로피우스, 1919)


그로피우스는 1919년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위협받은 인간 정서와 본질을 "장인과 예술가 사이에 오만한 장벽을 만드는 계층의 구분이 없는 새로운 제조자 커뮤니티"로서의 바우하우스를 통해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교육의 방향성은 당대 강조된 자유의지론, 독일 표현주의의 고딕 예술, 신비주의 영성과 결합하며 독특한 커리큘럼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마이스터, 즉 교수 중 한 명이었던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의 영향이 크게 두드러졌다.


요하네스 이텐 c. 1920

요하네스 이텐

(외관 상으로 나로 하여금 언제나 영화 <<엑스맨>> 속 뮤턴트 스쿨 교장을 상기하게 만드는) 이텐은 1919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 마이스터로 부임하여 1923년까지 바우하우스에 재직했다. 당시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과 같이 이텐은 공예와 미술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지워야 하며,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격려하는 "배우지 않음(Unlearning)" 또는 "탈교육(Deschooling)" 운동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수업 중 일부는 촉각과 색채 감각, 공간과 구성감각을 깨우기 위해 재료와 형태에 대한 반복적인 탐구로 몇 달에 걸쳐 지속되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건강운동 마즈다즈난의 추종자이기도 했던 이텐은 이 과정에서 마음과 감각을 열기 위한 방법론적 접근으로 엄격한 채식주의, 단식, 호흡법 등을 교수법에 포함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열렬한 학생 추종자들에게 그는 으깬 채소를 마늘과 섞어 만든 일종의 죽과 명상을 처방했는데, 학생들 중 일부는 이 엄격한 식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반 죽을 달라고 식단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학생들과 건물 내부에 진동하는 마늘 냄새로 인해 방문객들과 일부 다른 교수들이 항의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전쟁 이후 국내외로 경제적,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던 독일의 상황에서 논란거리가 되는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침과 이로 인해 조성된 비영리적, 자기중심적 교내 분위기는 지방정부의 지원을 이어나가기에 불리했다. 학교 교육이 경제적, 실용적 가치가 떨어지고, 정치적 성향으로도 급진 좌파 사회주의자와 볼셰비키파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정치적 비난의 타깃이 되었던 바우하우스가 지방정부의 투자가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정치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그로피우스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텐 수업에 참여하며 옥상에서 아침 운동 중인 학생들, 1931


1923년 이텐은 바우하우스를 떠난다. 그가 설파했던 신비주의적 철학과 교육방식은 이제 '공예와 미술, 그리고 기술의 결합'이라는 그로피우스의 새로운 슬로건으로 대체된다. 공예와 미술에 기술이 통합되면서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에는 엄격함과 합리성이 도입되고, 이텐을 대신할 교수로는 구성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한 예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가 물망에 오른다. 그로피우스는 모호이너지에게 교수직을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모호이너지는 바우하우스 예비 과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


라슬로 모호이너지, 손이 있는 자화상, 1925-1929. 젤라틴 실버 프린트.


바이마르에서의 초기 바우하우스는 표현주의와 수공예에 가까웠다. 그러나 1923년, 모호이너지가 부임한 이후에는 예술과 산업을 위한 만남의 장으로 재정립된다. 모호이너지는 아방가르드에 열정을 보였고 인쇄 디자인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구성주의 예술과 사진, 포토몽타주에 재능을 보인 예술가였다. 그는 바우하우스 교내 출판사의 시각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원, 사각형, 삼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기본 도형을 결합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학교의 외부 이미지 확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모호이너지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교내 출판사의 레터헤드(좌)와 로고 디자인(우), 1923

모호이너지는 바우하우스에서 1923년부터 1928년까지 교직을 이어갔다. 그의 리더십은 바우하우스가 대중적으로 호의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그 과정 가운데 그 자신도 구성주의 예술분야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925년,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이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 사태를 거치며 우경화되어 가던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체불하는 사태가 발생하며 바우하우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대폭 삭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로피우스는 학교장으로서의 계약 만료와 더불어 독일 정부로부터 정치적 지원도 철회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되며 바우하우스는 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때 미국의 도움으로 독일 정부가 재기하게 되면서 그로피우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독일 지방 곳곳의 산업 중심 도시들이 바우하우스를 자기 지역에서 새롭게 이어가 보지 않겠느냐 제안했던 것이다. 새로운 캠퍼스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건축 경험이 필요했고,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는 이를 충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 바이마르에서 멀지 않은 데사우에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터전을 바탕으로 1933년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진 아돌프 히틀러가 바우하우스를 폐쇄하기 전까지 교육을 지속한다.


삶의 흔적으로서 건축 그리고 디자인

실제 강의에서는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여러 디자이너들의 작품들과 후기 바우하우스에 교장으로 취임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이야기까지 포함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점은 아무래도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바우하우스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에 맞춰져 있었기에 글에서는 이 정도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또 부끄럽지만 글을 시작하고 써내려 가는 과정에서도 그렇게 조직적으로 접근하지 않아서 길고 길어질 이야기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바우하우스는 오늘날 '유럽의 모든 디자인과 건축 운동의 원천'이라 칭송받으며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대표하는 미니멀리스트 모더니즘의 엄격함, 건축을 포함한 새로운 예술과 디자인적 실험들은 '무(無)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 혹은 마법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독일의 역사적 흐름 가운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직면했던 삶의 상황들에서 만들어진 결과물로 존재한다. 결국 삶의 흔적인 것이다.




대학 강의만 하지 말고 글도 써보라는 남편의 지속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권유로 일단 쓰기를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신화 속 헤르메스와 같은 메신저, 지식 전달의 부드러운 통로가 되는 역할 그 외에 다른 것을 꿈꿔본 적은 없다. 일상을 끄적이거나 건축 관련 단상을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정도, 그 이상은 뭔지 모르게 오만방자하게 느껴져 강의록을 남기는 것조차 두렵게 느끼던 나. 그 언제나 역시 글쓰기는 내게 있어 내면에 존재하는 깊이를 모를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이다.
근대건축이라는 매스를 논함에 있어 바우하우스는 이를 이루는 매우 크고도 아주 작은 조각이다. 이를 시작으로 조각조각을 이어 붙여 다시금 하나 엇비슷한 뭉텅이를 만드는 데 이제부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도통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조각조각의 이야기가 모여 만들 조각보 건축. 어설픈 손길이지만 부디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기워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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