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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건축

계단에 대한 선입견과 해석학적 재조명

by 이민정

20세기 기능주의 건축 경향과 마천루의 등장은 공간의 용도와 구조, 형태, 미적 가치 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건축물을 구성하는 세부 공간들의 위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건축 공간 내에도 소위 중심과 주변 관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계단은 소외된 공간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계단은 역사적으로 건축공간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일상세계에 잠재된 새로움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가능성을 지닌다. 오랜 시간 동안 계단은 공간을 연결·확장하는 건축요소이자, 기존의 건축 질서에 질적 새로움과 윤택함을 가져오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계단은 거주자의 감각과 지각, 더 나아가 행위와 관계하며, 정신적 흐름인 감정을 논리적인 건축 형식을 통해 형상화한다. 다시 말해 기능적 도구이면서, 존재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세계의 질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일부 근현대건축은 계단을 공간의 수익성·생산성에 저해되는 공용부문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창조적 건축을 위해서는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건물과 계단을 공간의 총체적 질적 흐름을 공유하는 전체와 부분이라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단에 대한 선입견

계단의 도구성: 편리와 안전

계단은 일반적으로 두 공간의 높이차를 연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적 도구로서 “사람이 오르내리기 위하여 건물이나 비탈에 만든 층층대”로 정의된다. 한국 전통건축의 경우, 계단은 평평한 지반을 조금 높여 습기를 방지하거나 해충으로부터 보호기능을 하는 기단과 함께 나타났다. 지상주거 건축이 정형화되기 시작한 삼국시대 이후부터 건축 기술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기단 축조 방식도 토단, 석축기단, 와축기단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계단도 다채로운 방식으로 생성되었다.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공간인 계단에서 편리와 안전에 대한 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에 계단의 이용성과 안전성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강조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십서(建築十書)』 제3서에서 신전건축에 있어 계단의 치수와 단수에 대해, 제6서에서는 계단에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채광의 중요성에 대해 기술한다.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는 비례가 맞지 않는 불편한 계단을 걷는 것은 형벌과도 같다고 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템플러라는 연구자는 위험할 바에야 계단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계단은 미국, 영국, 스웨덴, 한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건축법에서 편의시설의 하나이자 피난·방재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여 거주자의 편리와 안전을 위한 접근성 및 이용성을 기초개념으로 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계단에서 일어나는 공간과 정신의 상호관계

편리와 안전이라는 계단의 실용성 추구 경향은 전 세계적으로 풍토나 문화와 관계없이 보편성을 띤다. 계단은 신체가 움직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단에서의 움직임은 신체성뿐 아니라 정신성도 함께 가진다. 아래에서 살펴볼 선행연구들은 계단에서 정신적 움직임을 일으키는 자극을 시각적 자극과 촉각적 자극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다루는 경향을 보여준다.


먼저, 계단이 주는 시각적 자극은 계단의 폭, 경사, 접지성 등과 관계된다고 알려졌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혹은 계단을 위로 혹은 아래로 볼 때 사람의 시선도 함께 이동한다. 시선의 이동과 계단의 물리적 특성들이 여러 가지 정신적·심리적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계단 형태와 시각적 반응을 심리상태와 관계 지은 연구들도 존재한다. 계단이 주는 시각적 자극과 정신적 반응의 관계는 로마의 스페인 계단에 대한 스컬리의 이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계단이 주는 촉각적 자극과 정신적 반응의 관계는 주로 계단의 형태와 그에 따르는 신체적 리듬에 의해 나타난다고 알려졌다. 예를 들어, 계단의 치수, 즉 계단참과 높이의 비율이 계단 폭의 넓고 좁음 및 계단의 방향 변화와 연동되어 각기 다른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리듬은 정신의 흐름과 관계되어 계단을 오를 때와 내릴 때가 다르게 나타난다.


계단이 지니는 오름과 내림의 기호성

오름과 내림의 행위는 계단의 위-아래의 공간구조가 유도하는 정신적 흐름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이를 바탕으로 계단은 기표로서 문화·종교·언어권과 같은 일련의 공동세계 내에서 존재자들이 갖는 공동의 감(感), 즉 공동세계의 질(質)을 표출한다. 그러므로 계단은 공동세계에서 이해된 질서에 따라 공동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타당한 의미를 전달한다.


계단이 담아내는 공동세계의 일상적 질서는 계단에 내재하는 위-아래의 공간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위-아래가 형성하는 계단의 격(隔)은 통합과 분리가 공존하는 모호한 경계의 형태로서,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앙아시아의 지구라트, 고대 마야문명의 욱스말(Uxmal) 피라미드, 고구려 장군총 등은 "성(聖)과 속(俗)"이 건축적으로 현실화된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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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판테온 신전(좌), 이라크 우르 지구라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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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기자 피라미드(좌), 중국 지린성 고구려 장군총(우)


실제로 비트루비우스는 신전건축의 계단 설계에 대해 기술하면서 권위를 상징하는 대칭과 비례의 규칙을 강조한다. 이는 계단이 고대 그리스 당시의 공동세계가 지닌 질서에 따라 종교·정치적 가치, 즉 주체의 현시(顯示, manifestation)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질적 의미를 내포하였음을 시사한다. 한국 전통건축물에서도 기단 및 계단의 축조방식은 오랫동안 구조적 문제없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엄정하고 세밀하게 가공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졸박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 공동의 세계 내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질서와 무질서의 고유한 세계인식 논리구조를 함께 보여준다.

KOCIS_Korea_Soswaewon_01_(7581350982).jpg 전라남도 담양군 소쇄원 제월당 계단


계단은 위계가 높은 공간으로의 직접적인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지만 울타리나 문과 같은 구실을 한 것은 아니다. 계단은 울타리나 문에 한 가지 차원을 더하여 더욱 깊이 있는 과정적 공간을 끌어내며 공간과 공간을 잇는 전이공간 역할을 한다. 일례로 범어사와 같이 다수의 단층건축물이 하나의 대지에 펼쳐지는 것이 주를 이루는 한국 전통건축에서 이러한 과정적 공간은 건물들 사이의 배치에 계단으로 절정에 달한다. 범어사에서는 일주문에서 불이문까지의 과정적 공간과 보제루를 거쳐 대웅전을 중심으로 비워진 마당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둘러싼 자장전과 관음전이 기단 및 계단을 통해 위상학적 상징성을 갖게 된다.

20191230190102540_oen.jpeg 범어사 전경(Copyright: Visit Busan)


이러한 상징성은 조선 후기 중상류 주거건축의 마당 구성 형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함양 일두고택의 예에서와 같이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분리되는 공간 구성 형식은 기능뿐 아니라 동선 분리를 통한 영역 구분을 보임에 따라 고도의 정서와 권위를 표현한다.


intro_map.gif 함양 일두고택 배치도(www.ildugotaek.kr)


이 같은 공간 특징은 계단에서의 오름과 내림이라는 신체의 움직임과 시선의 역동적 이동에 집약되어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중요하고 성스러운 곳, 사적인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나아가 사회적 경계를 심리적 저항과 부담으로 전이·심화한다. 이로 인해 물리적 위치가 높아질수록 위계와 질서가 강하게 나타나고, 낮아질수록 무질서가 강하게 표상된다. 이는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관념이 계단을 통해 형상화된 것으로서, 계단을 통한 성과 속의 현실화는 공동세계 내에 존재하는 공감을 바탕으로 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하기에 만일 건축가가 계단을 지시 기능을 지닌 기호 그 자체로만 인식할 경우, 이에 바탕을 둔 공간 이해는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 위험이 있다.


계단에 대한 해석학적 재조명

계단의 소외 현상

상기에서 살펴본 계단의 다양한 측면은 20세기 이후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20세기 초기에 유행한 기능주의 건축 경향과 아방가르드의 19세기 역사주의에 대한 거부에 따라 계단이 건축에서 낭비 요소로 간주됐다. 이 같은 경향이 계단의 위상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건물이 고층화, 대형화되고 지하층의 개발도 심화되면서 화재, 테러 등과 같은 긴급 상황 시 피난대책 마련의 필요성도 계단의 위상변화에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건축이 고층화되고 거주자의 안전을 위한 건축법규가 제·개정되면서 계단은 비상탈출구의 역할을 담당하여 건물 내에서 독립된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삶의 필요와 그에 상응하여 생겨난 규칙에 더불어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가 계단의 역할을 대체하면서 계단은 실용주의 사고방식에 따라 필요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동적으로 담당하는 한정적 존재로 그 의미가 축소된 것이다.


마린시티_아파트.jpg 부산 해운대 고층건물군


계단의 소외 현상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일례가 건축의 프로그램에 따라 뚜렷한 기능을 수행하는 실(室)이 중심이 되고 그 외 공간은 중심적 공간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며 공간의 강약과 흐름을 조절하는 칸(Kahn)의 ‘주공간(served space)’과 ‘보조공간(servant space)’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Blewett & Mohler(2014)가 기술한 바처럼, 칸의 주공간과 보조공간은 ‘전경과 배경(figure-ground)의 관계’ 임에는 틀림없다. 주공간과 보조공간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는, 서로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공간 관계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자와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공간(주공간)과 서비스 코어(보조공간)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건축가가 여전히 공간을 위계질서에 따라 인식하는 오류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공간과 보조공간의 상호관계성을 바르게 인식할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계단이라는 소외된 공간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은 물론, 그 미학적 가치까지 다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계단에 대한 해석학적 재조명

역사적으로 계단은 오름과 내림이라는 수직적 움직임을 위한 건축적 도구인 동시에 삶이 추구하는 질적 가치들을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변화에 따라 기능주의와 국제주의 양식에 가려져 깊은 의미들이 다채롭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의미들이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고정된 형태 너머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의의 세계를 통찰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는 공동세계 혹은 지평 내에서 질서와 무질서를 그려내는 고유한 삶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이후 살펴볼 김수근의 공간사옥 계단 해석에 있어 가시적 형태 분석이라는 피상적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더 깊은 의미를 찾는 데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크게 유·불·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전통사상에서 질서와 무질서, 통제와 혼란, 상위와 하위는 철저하게 분리되지 않고, 이기지묘(理氣之妙) 혹은 실허지묘(實虛之妙)로 존재한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전통건축에 축적된 질서와 그 질서 속의 다채로운 변주는 이기지묘에 대한 좋은 예이다. 종묘나 궁궐의 월대, 불국사의 청운·백운교, 부석사의 누하진입로 혹은 한국 전통건축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딤돌에서 신발을 벗고 건축 내부로 이어지게 되는 단차와 같은 건축 장치로서 전이공간은 선조들이 체험으로 인식하고 현실화했던 질서와 무질서의 공존을 건축적으로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99FCE6505F1476B113.jpeg 경희궁 숭정전 월대 및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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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계단(좌), 한국 민속촌 초가 기단(우)


이같이 계단에 대해 개인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계단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물론,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달리 해석됨에 따라 재창조의 가능성은 더욱 깊어진다.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 계단은 더욱 다채로워지고 있는 현대건축에 전통을 기초로 한 새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다시 주목하여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 건축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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