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공간사옥(1971~1977, 이하 공간사옥)은 건축가 김수근 그 자신과 자신이 이끌었던 '공간그룹'을 위한 건축물이었다. 이에 건축가 자신이 추구한 가치를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건축물은 전통적 이미지들이 건축형태에 융화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인다고 알려졌다. 특히 공간사옥에는 장세양이 설계한 유리사옥(신사옥, 1996~97)과 이상림의 한옥(2002) 또한 부가되어 있으나 이 글에서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구사옥 부문만을 해석의 대상으로 한다. 물론 한 건축가의 특정 작품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의 과도기적 작품을 선택하여 살펴보는 것은 건축가의 고민과 실험적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할 수 있다. 공간사옥의 계단이 품고 있는 고유한 특질을 살펴보는 이 같은 시도는 계단에 대한 가시적인 구조, 형태, 혹은 기술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질적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김수근의 공동세계에 대한 이해와 자기 이해, 그리고 김수근이 가졌던 창조에 대한 이해 방식을 해석해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같은 해석과 비평은 공간사옥이 오늘날의 건축에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함은 물론, 타자화된 계단공간을 다시 중요한 건축의 한 부분으로 재조명하면서 한국 전통건축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더 큰 질문도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수근이 건축가로서 어떻게 전통을 이해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수근이 전통에 대해 가진 선이해를 앎으로써 이것이 어떻게 공간사옥 계단에 반영되게 되는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공간사옥에 나타나는 계단을 필로티 측 계단, 건물의 북측 계단, 그리고 남측 계단으로 크게 나누어 계단에서 체험되는 현상을 기술하고 김수근의 전통 이해 방식과 연관 지어 해석하고자 한다.
김수근은 여러 글과 건축물에서 비움에 대하여 강조한 바 있다. 그가 강조한 비움은 미국의 건축사학자이자 이론가 빈센트 스컬리(1984)가 기술한 "인간을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하는]... 어떤 결과도 승리도 없으며, 다만 화려하고 불확실한 협약과... 현혹적 빛만이 존재하는" 허무주의적 비움으로서 입체들(soilds)에 상대되는 개념, 비어있는 부분을 일컫는 공허(void)를 뜻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한 비움이란 김수근 자신의 기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그가 해석한 한국의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이라는 거대한 시간적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근원적 공감을 ‘알맹이’로 가진다. 김수근은 유산과 전통을 구분한다. 그에게 있어 유산이란 이어받고 이어 넘길 수 있는 물질적 보존가능성을 지닌 사물인 반면, 전통은 시대의 고유한 것을 반영하여 창조해 나가는 것이었다.
고전형식의 되풀이나 모방이 전통계승이라 할 수 없다.…전통의 계승은 전통의 창조적인 계승을 말한다. 오히려 전통의 변혁이 올바른 전통계승이라 할 수 있다.
김수근은 건축공간의 여유는 '내용 있는 비움'에서 온다고 강조하였다. 이때 여유는 산수화가 갖는 옛 그림의 여백과 같다. 여백이 머금은 비움의 형태가 의도적으로 그려질 때 산수화의 진정한 멋이 나게 된다. 비움의 참된 멋은 물리적 비움이 아니라 멋이 있는 비움, 색깔 있는 비움, 다시 말해 공동세계의 질(質)을 재창조하는 역사적 사건, 혹은 ‘알맹이 있는 빈칸’, 곧 실허지묘(實虛之妙)로서의 공간(空間)이다.
김수근은 또한 ‘특별한 어떤 것(something special)’을 가져오기 위해 전통을 강조하였다. 창조에 대한 그의 ‘선입견’에 따르면, 이 특별한 어떤 것이란 창조를 향한 인간의 비합리적 충동과 갈망으로 인해 나타난다. 이때 언급된 창조물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임의적인 무엇, 알 수 없었기에 충격적인, 신비하거나 환상적인 그 무엇을 의미하는 듯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김수근의 전통에 대한 사유에서 살펴보았듯, 김수근에게 있어 창조와 새로움의 기반은 시대의 고유한 질서를 바탕으로 한다. 김수근에게 전통은 “밑바닥에 흐르는 생명력”, 즉 무형의 실재(實在)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유산’과는 구별된다. 김수근은 유산을 전통의 창조를 위한 ‘양분’이라고 말한다. 형(形)을 양분으로 받아들여,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유산을 만든 이들의 ‘생명’을 통찰하고 이를 “스스로 씹어 삼키고 소화한 후 자기 스스로 창출하는” 질적 생산 활동이 전통의 창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근이 주장한 전통의 창조는 엄밀히 말해 지평융합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재창조’에 더 가깝다고 해석하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기독교 창조론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는 맥을 달리함을 유추할 수 있다. 건축을 무에서의 창조 행위로 볼 경우, 건축가는 창조주체로서 피조물을 초월한 신적 존재이다. 성경의 히브리서 11장 10절은 아브라함이 조물주를 성(城)의 흠 없는 '설계자', '제작자'로 바라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모든 것을 계획·의도, 숙고·통찰하는 가운데 건물을 만들어내는 ‘완벽한 설계자’로서의 성격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근의 창조이론에 따르면 건축가는 설계하는 사람이지만 ‘전문가’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전문가를 적절히 모아 협동시켜 가면서 중간 역할을 하는 일반가generalist”로서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같다. 김수근에게 건축가란 상식과 공감을 바탕으로 창조하는 사람이며, 한국 전통문화의 본질이라 일컬어지는 선비정신으로 일관하는 ‘20세기의 창조적 선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가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김수근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해석학적 지향점은 궁극공간(ultimate space)이다. 궁극공간을 강조하면서 그는 건축이 우선하여 갖는 보편성, 즉 물리적 보호와 편안함을 목적으로 하는 제1의 공간(primary space)과 필요에 적합한 효율과 기능을 가진 제2의 공간(secondary space)을 언급한다. 그는 생리적인 목적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목적 외에 창조를 향한 인간의 비합리적 충동과 갈망을 앞서 기술한 ‘특별한 어떤 것’이라 칭한다. 지평융합을 통해 특별한 어떤 것으로 나아가는 지향성은 김수근에게 있어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이다. 이러한 인간 본성을 담아내는 공간이 제3의 공간, 혹은 궁극공간이다.
김수근이 궁극공간의 적절한 예로 사랑공간을 일컬었음을 고려할 때, 궁극공간이란 전통의 창조를 위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목적 있는 쉼의 공간, 즉 “play와 work가 동시 발생적”이고 “예술적 차원에서 합일"하는, 공간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해석학적으로 볼 때, 주어진 사건(given event)으로서 선이해, 다시 말해 전통건축과 창조에 대한 김수근의 관점이 적극적인 해석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역사적 사건(historic event), 즉 건축공간이라는 실재(實在)로 재생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공간사옥은 경사진 대지의 형상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지어졌다. 대지의 성격은 건물 곳곳의 계단을 통해 보존되면서도 다채롭게 나타난다. 이 건물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이는 의도된 바도 있지만, 증축을 거치며 건물이 남북방향으로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이다.) 이 가운데 과거 지하 소극장 입구로 들어가는 폭넓은 계단이 만드는 썬큰가든은 원서탑과 한옥이 있는 중정과 출입문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연결시키는 한국 전통건축에서 마당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공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됨으로써 부수적인 접근 차단 효과도 나타난다.
이 공간은 경사진 대지를 활용하여 필로티 공간으로 만들어졌는데, 계단이 도입되어 비움이 주는 공간적 부피감이 배가되고 있다. 이로 인해 단순한 필로티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곳이 마당의 이미지에 더하여 연못과 같은 수공간(水空間)의 이미지 등, 다수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지금은 없어진 가운데가 움푹 파인 석물과 그 너머 보이는 또 다른 단차와 원서탑, 한옥 등은 이 공간에 원근감을 더하는 부가적 장치들이다.
김수근의 제자인 건축가 승효상이 화두 중 하나로 내세운 ‘문화풍경’의 출현을 암시하기도 하는 이 공간에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계단을 통해 역사적 사건으로서 질적으로 융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승효상은 근대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며, 문화풍경(Kulturlandschaft, culturescape)을 자신의 화두로 제시했다. "역사적 기억 없이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다. 과거와 그로 인한 문화풍경은 자유로운 우리 인간의 본성을 성취하도록 하며 특별히 모든 종파주의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승효상 (2012)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컬처그라퍼, p.234) 사건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고립되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맞닥뜨려졌을 때 일어나는 관계 맺기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계단이 통합하는 비워진 공간에 원서탑, 한옥, 공간사옥과 같은 요소들이 군집하여 질적으로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이라는 단어는 과거와 연결된 독특한 현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이란 단순히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세계의 질(質)을 재창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질(質)은 부분에서 전체에까지 변화하면서 스며들어 있다.
마당 혹은 수공간(水空間)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들이 포개지는 이 공간은 전통적 공간구성 방식을 근현대건축의 건축언어로 새롭게 담아낸다. 이미지들이 내포하는 한국이라는 공동세계의 근원적 질(質)은 경사진 대지 일부를 계단을 통한 필로티 공간으로 처리함으로써 얻어지는 비움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공간사옥 외부 공간의 계단에서는 기억은 상상의 바탕이라는 사고를 전제로, 전통은 현재와 호흡할 때 비로소 회복되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김수근의 해석학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단게 겐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전통에 대한 김수근의 이 같은 입장은 앞서 인용된 그의 문장에서 보듯, 전통은 직접적인 형태의 모방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머금은 공동세계의 근원적 질(質)을 새로운 기술과 창조성으로 새롭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계단이 구축하는 이 공간의 형태는 김수근의 전통과 창조에 대한 개인적 선입견이 1970년대 한국이라는 하나의 세계에 그의 해석학적 지향점과 융화되어 펼쳐진 지평융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정에 설치된 탑이나 각종 조형물인 공동세계의 질(質)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들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이들은 공동세계의 질(質)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빈틈, 즉 계단이 통합하는 비움과 만났다가, 비로소 거주자의 정서와 교감하지만, 이들 직접적인 기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공간의 깊이도 지금보다 현저히 얕지 않았을까 의문시된다. 그럼에도 공간사옥의 계단을 사이(間)로 표현함으로써 한국 전통건축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 점만큼은 가치 있다고 판단된다.
김수근은 계단을 ‘훌륭한 길’이라고 표현하며, 계단을 길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김수근에게 길은 목적지까지의 통행이라는 일차적 유용성은 물론,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기에 미지의 ‘해프닝’이 잠재된 공간이다.
김수근에게 계단이란 “움직이는 몸이자 지각을 지닌 단위”인 사람이 다니는 길과 같다. “삶의 공간 안에서의 여러 활동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인 사람을 위한 유용성을 갖춘 공간인 것이다. 1958년 유락 레스토랑 스케치에서 이미 예견된 계단에 대한 김수근의 관심은 길처럼 계단도 원래 부여받은 목적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며 공간사옥 전체의 분위기와 공명한다.
공간사옥 내부는 계단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구획될 수 있다. 1) 증축된 부분에 있는 주출입구 쪽 삼각형 계단이 연결하는 건물 북측과 2) 김수근의 작업실과 U자형 계단 및 원형 계단이 있는 건물 남측이 그것이다.
증축된 건물의 주출입구 쪽 계단 폭은 약 1m에서 위로 갈수록 점차 좁아져 종국에는 약 60cm로 한 번에 한 사람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 된다. 일견, 답답하다고 평가되기도 하고, 그의 스승 요시무라 쥰조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수준일 뿐이라 비판받기도 하는 협소한 규모는 계단을 오름에 있어 막연한 기대감을 배가시킨다. 이 기대감은 상승, 성취 또는 정복을 위한 노력이라는 계단에 대한 선입견과 좁아지는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이는 투시감에 기인한다. 그러나 꼭대기 층에 이르러 발견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이에 사용자는 익숙한 논리에 따라 기대하던 바가 차단되는 심리적 모순을 경험한다. 실제로 계단을 통해 목적지에 도달하는 절정·안도감을 주는 하강하는 빛과의 만남은 삼각형의 계단을 거쳐 연결되는 지상 3층 스킵플로어 공간과 건물 남측 원형 계단에서 이루어진다.
이 같은 반전과 모순은 익숙한 공동세계의 질서를 차단함으로써 질서 이면의 잠재적 측면, 즉 또 다른 질서에 대한 인정으로서 무질서를 인지하게 한다. (여기서 무질서는 김수근이 주장한 ‘네거티비즘(negativism)’과 통하는 점이 있다. 김수근은 건축의 네거티비즘을 기술하면서 적극적 행위가 불러올 긍정적 결과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으킬 또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기 파괴적 무화(無化)와는 구별된다.) 신체와 정신의 융합은 계단이 드러내는 대립 요소들로 더욱 구체화된다. 주출입구 쪽 계단실은 원형 계단과는 달리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다른 공간들과 소통할 수 있지만, 벽돌의 낮은 채도와 거친 촉감, 그리고 좁은 계단 폭으로 인해 소통은 온전한 열림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둡고 진중한 분위기를 보인다. 반면, 수직 창으로 유입되는 빛과 주변 경관의 다채로움은 공간 내부의 어둠과 무게에 대비된다. 어둠과 밝음, 무거움과 가벼움, 시야의 닫힘과 열림 사이의 대비가 오르내리는 신체 리듬에 겹쳐진다.
공간사옥의 계단이 밝히는 바는 한 개인의 정신과 신체의 융합, 나아가 공동세계와 자기의 상호관입 관계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공동존재라는 인간의 존재성이다. 건물 내에서 공간은 계단이 주도적으로 연결하는 실과 실의 연속적 관계로 드러나며, 이에 공간사옥 계단은 함께 있는 존재로서 공동세계 및 자기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하여 표현한다. 계단과의 관계를 통해 공간이 확장되는 과정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공동세계와 자기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보편적인 삶의 여정, 해석학적 순환과 동궤(同軌)를 그린다.
상기에서는 김수근이 해석한 전통의 현시로서 사이의 계단과 공동세계 및 자기 이해로 이르는 길로서의 계단 등, 공간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도구라는 일차적 기능 이상으로 계단이 해석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계단은 특별한 어떤 것을 드러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계단은 김수근이 언급한 ‘궁극공간(ultimate space)', 즉 특별한 어떤 것이 살아있는, 시공간적 여유와 실과 실을 연결함으로써 해프닝을 생성하는 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김수근은 궁극공간의 예로 사랑공간을 들곤 했다. 한국 전통공간에서 사랑공간은 자연에서의 쉼과 동시에 예술적 창조, 즉 일상이 특별한 역사적 순간으로 변모하는 에너지가 있는 공간으로, 실제로 김수근이 U자형 계단을 거쳐 원형 계단이 안내하는 공간사옥 남측 최상층의 사랑공간에는 발코니가 연결되어 도심 속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장수(藏修)의 공간 역할을 한 김수근의 작업실이 같은 층에 구분되어 있었음을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더욱 힘을 얻는다. 그렇다면 창조의 기운(氣運)이 넘실대는 제3의 공간, 즉 궁극공간을 향하는 원형 계단은 속기(俗氣)를 떨쳐내기 위해 몸가짐을 바로 하고 정신을 고양하는 건축적 장치라 해석할 수 있다.
공간사옥의 원형 계단은 형태적으로는 유럽사회의 보편적인 원형 계단을 닮았다. 한편으로는 U자형 계단에 설치된 밧줄이 주는 배 이미지와 원형 계단의 폐쇄성으로 인해 잠수함을 떠올리게 한다고 알려지기도 했다(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이상림 인터뷰 내용). 그러나 계단의 핵심 역할은 연상되는 이미지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한국 전통건축의 과정적 공간의 성격을 띤다. 원형 계단이 이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공동세계에서 근원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계단에서의 오름과 내림이 주는 상징 및 공간과 정신의 관계가 상호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형 계단은 반경 1m가 채 되지 않으며 천창을 제외하면 사방이 막혀있다. 위로는 떨어지는 빛이 있고 아래로는 어둠이 있어 여기에서 오름의 행위는 당장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김수근의 공동세계와 자기에 대한 이해를 고려할 때, 이를 유럽문화의 상징을 따라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보다는 전통사상인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 땅(-), 사람(│)에서 창조적인 일반가(generalist), 혹은 매개자로서, 우주와 더불어 서 있는 사람됨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특별한 어떤 것을 향하는 원형 계단에서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세상에 물든 자기를 털어내는 비움의 걸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수근은 원형 계단을 통해 특별한 어떤 것을 구하는 인간 본성을 한국이라는 공동세계에서 공감되는 이기지묘의 조화 원리를 따라 건축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따라서 궁극공간으로 오르는 계단은 김수근 식의 ‘사람됨’으로 나아가는 신체적·정신적 의식(儀式)을 건축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김수근은 공간사옥 계단에서 전통공간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건물에서 어둠과 밝음, 닫힘과 열림의 리듬을 타는 공간은 계단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건축의 과정적 공간을 환기하며 재창조된다. 공간사옥의 계단은 단순히 기능적 연결, 혹은 공간 간의 단절이 아니라 공간들의 사이(間)이자, 비움으로 귀결되는 한국 전통건축의 질(質)을 그리는 빈틈이다. 또한 공간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시선이 머물고 사색이 있는 산책로이기도 하다. 나아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기와 공동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하고, 유희하는 인간 호모루덴스(homo ludens)로서의 인간 본성을 찾기 위해 관습에 젖은 정신을 새롭게 하는 전이공간이기도 하다.
계단은 공간의 수직·수평적 확장을 위한 제1의 도구인 동시에 소통과 창조, 역사적 사건으로 나아가는 제2, 제3의 창조적 방법으로서 큰 잠재성을 지닌다. 공동세계의 질(質)은 문화로, 문화는 창조적 건축으로 구체화되며, 계단은 창조적 건축 공간의 한 부분이자 상징으로서 문화 저변의 공동세계와 질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채로운 형상적 차이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김수근이 건축가로서 정체성 확립에 기반을 둔 선비정신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 자체로 한국문화의 한 측면에 구속되는 한계로 볼 수도 있다.
지음에 대한 과거의 전통적 사유와 현대적 사유가 건축으로 융화되어 실재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해석과정이 필요하다. 여타 해석학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는 연구들이 그러하듯, 상기와 같은 해석 행위를 통해 더 깊은, 혹은 기존의 해석과는 또 다른 이해의 새 틈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지평융합의 장(場)을 마련한다는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