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건축을 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통로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시각은 보편화되었다. 건축가의 관점에서 설계 행위는 일련의 건물 이용자를 위한 노동인 동시에 외부세계, 곧 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공간적 표현작업이라 할 수 있다. 건축가는 건축공간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외부세계와 소통한다. 심리적이자 물리적 설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득 과정에서 건축가는 해당 대지와 관계하는 이용자의 기억, 상상, 꿈, 신체적 지각 등을 짚어가며 건축물이라는 직접적인 물리적 형태와 공간을 창조적으로 구축하게 된다. 이 같은 구체적 구축 방식은 건축가에 따라 향수를 자극하며 낭만적이거나 극도로 표현주의적일 수 있다. 혹은 감정이 배제된 채 이성적이고 현실적, 합리적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지극히 유토피아적이거나 미래주의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구축 방식이 선택되느냐에 관계없이, 그 결과물인 건축은 그 자체로 수사학이 되어 이용자와의 소통을 이끌어 낸다.
건축형태로 표현된 바는 이미 구축되어 있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의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어떠한 틀을 통해서 서로 다른 개인, 집단, 사회 내에서 체험적으로 인지되고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을 거친 산물로서 ‘이해(理解, understanding)’가 나타나며, 이러한 이해는 건축에 내재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이미 구축되어 있는 해석의 바탕이 된 세계와 융합되면서 앞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기존의 세계에 스며들어 안착하기도 한다. 공동세계를 바탕으로 한 비동일의 또 다른 세계가 서로 다른 강도와 차원으로 생성하게 되며, 건축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자극을 활성화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 건축가가 일련의 건축 작업을 통해 외부세계와 시도하는 담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건축이 이해의 과정 가운데 생성하는 다수의 세계와 함께 걸어가는 어울림이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시도에는 기존의 건축세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근대건축은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변화 양상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국제주의 양식으로 대표되는 근대건축 양상의 문제점은 형태적 복제 속에서 그것이 최초에 전달하고자 했던 바를 간과함으로써 건축이 더 이상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한 창조 행위가 아닌, 모방과 복제로 만들어지는 저가의 대량 생산품 중 하나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비롯한 여러 근대 건축가들이 정초한 기술 수법과 건축이론은 근대건축의 언어로 유형화, 보편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당대 사회적 문제에 공감하며 해결책으로서 제안했던 건축적 시도들에 내재하는 인본주의는 잊힌 채 피상적인 형태의 복제와 경제적 적용을 주요 결과로 낳았다. 원래의 모더니즘 건축으로부터 상실된 의미에서 새로운 질적 가치를 탐험하며 많은 이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보여준 새로움은 일회적 역사주의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가 주장하는 다원성을 드러내기에 급급하며 또 다른 모습의 '관습'이 되어버렸다.(Ando, T. 'Toward new horizons in architecture' in K. Nesbitt and G.R.D Underhill (eds), Theorizing a New Agenda for Architecture. 1996. New York: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향을 비판하며 여전히 모더니즘의 그림자 속에 살아가는 포스트모던의 현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그 스스로를 모더니스트(modernist)라 부른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있어 모더니스트로서 안도 다다오 건축의 의미 층위를 치환은유와 병치은유라는 수사학의 큰 축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모더니즘 건축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세계를 진단하고, 그 세계에서 드러나는 창조성의 성격을 분석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성의 성격을 기반으로 모더니스트로서 안도 다다오 건축의 정체성을 분석한 후 그의 모더니티(modernity)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치환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적 은유를 일컫는다. 이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원래의 사물에 유사성을 갖는 다른 사물의 성격을 겹쳐 드러낸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의 전이를 통해 두 사물 간의 관계를 강조한다.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로 시작되는 셰익스피어의 <소넷 18>은 은유의 전통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짧은 여름은 스쳐가듯 지날지라도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고 이어지면서 화자가 사모하는 연인의 아름다움 또한 영원히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연인에 대한 시적 화자의 예찬을 보여준다. 원 관념, 즉 시적 화자가 사랑하는 이가 보조관념인 여름날에 견주어짐으로써 여름날이 갖는 따스함으로 연인을 표현한다. 이때 여름날은 연인을 이미지화하며 상징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은유가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한다.
치환은유를 통해 일어나는 의미작용에 있어 원 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는 ‘임의성’과 ‘관습성’을 특징으로 한다. 임의성이라 함은 치환은유가 대개 공동세계에서 형성된 문화를 바탕으로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상식적인 의미작용에 기인한다. 관습성이라 함은 치환은유의 의미작용이 임의성을 바탕으로 한 일상성의 경계 내에서 코드화되어 체계 속에서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그리하여 사회 내에서 공유 가능한 의미를 전달함을 의미한다.
앞서 본 <소넷 18>에 나타난 치환은유를 이 표현이 얼마나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며 음미해 보자. 그러면 실제로 한 여름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하는 것은 평균기온 12-24도에 그치는 짧지만 아름다운 여름을 갖는 영국인들에게는 납득될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극도로 덥고 습하여 불쾌한 여름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비유는 영국인에 의해 쓰였다는 맥락이 추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한 화자의 정서에 입각하여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치환은유가 연속적 삶의 흔적, 혹은 투사로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 고착화되었으며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할 수 있다.
건축에 있어서 치환은유의 이러한 특징은 그대로 적용된다. 즉 임의성과 관습성이라는 특징은 건축 형태가 기능으로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체계 내에서 변증법적으로 변용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저술 시기가 다른 다음의 두 고시(古時)에서 서글픔이라는 내포된 의미가 배꽃이라는 외시로 코드화되어 유사한 의미작용을 일으키며 반복되고 있는 것과 같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하고 읊었던 고려 후기 문신 이조년(李兆年)의 시조와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여류시인 매창(梅窓)의 시에서는 그리움 혹은 서글픔의 정서가 이화, 곧 배꽃으로 치환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건축물의 형태, 즉 외시를 통한 특정 기능 혹은 관념의 지시기능’이라는 치환은유화는 실제로 산업혁명이 발생하여 전 세계의 모든 영역이 대대적인 전환을 맞이하는 근대 이전까지 건축사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개별 이름을 갖는 건축사조들이 각각의 건축적 스타일을 명백하게 계승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고의 연속적 양식은 고전적인 것(the classical)을 가리킴으로써 역사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NESBITT, K. and 최학종, 2006. 건축이론: 1965~1995 (II). 서울: 시공문화사. p.32)
치환은유의 임의성과 관습성의 특징은 세계화의 물결이 사회를 지배하는 21세기에 들어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기존의 지리적 경계가 자유로워짐으로써 흐려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문화의 경계 너머 하나의 코드로 통용될 수 있는 치환은유적 건축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축의 기능성이 근대가 추구한 기계적 효율성, 경제성의 가치들과 접목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국제주의 양식으로 나타난 현상은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체계의 미메시스로 간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전이 상징하는 영원한 진실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비고전적인 것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전과 다른 가치 체계를 호소하며 건축 형태에 하고 있는 실험 또한 이미 전 지구적으로 보편화되어버린 모더니즘 건축 담론에 적용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때에 따라서 치환은유는 사회적 이해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어 공유되어 이해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습성과 임의성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바탕을 공유하는 특정 사회 체계 내에서 코드화되어 성립한다.
치환은유가 전통적으로 코드화된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이해된다면 병치은유는 기의에서 자유로워진 기표들이 의도적으로 조합됨으로써 관련 없어 보이는 사물의 생경한 대응이 생성하는 새로운 의미를 기반으로 이해된다. 즉 관련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만들어지는 맥락을 바탕으로 의미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에서와 같이 ”싸우는 사랑이여, 사랑하는 미움이여" 라거나 "무거운 가벼움이여, 진실한 허영이여...(중략)...차디찬 불, 병든 건강이여, 늘 눈 떠 있는 잠이여,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1막 176~181행) 라는 모순되는 단어들의 조합은 만들어진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가 만들어내는 상황, 혹은 맥락을 벗어나면 가져와진 외연들의 조합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깨지고 만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 내에서 이해되었을 경우, 사랑이 갖는 이중성(반대 감정의 병존, ambivalence)으로 인해 사랑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갖는 감정의 상태는 좀 더 극명하고 풍성하게 전달되는 효과를 갖는다.
에즈라 파운드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에서도 보듯, 관계없어 보이는 보조관념들의 배열을 통해 맥락이 만들어내는 상황적 의미의 연결로 이해되는 것이다. <지하철정거장에서>는 전체 2행의 짧은 시로서, 그 1행은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얼굴들,”로 시작하며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이라는 2행으로 끝맺는다. 1912년 프랑스 파리의 기차역에서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본 찰나의 느낌을 일본의 하이쿠 스타일로 쓴 시이며, 이미지즘(imagism)의 정수로 손꼽히는데,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익명의 군중들 가운데 흰 얼굴의 여인과 아이를 본 순간을 관련 없는 이미지들의 병치로 추상적으로 간략하게 나타냄으로써 낯선 분위기를 상기시킴은 물론, 시를 읽는 독자에게 보다 큰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는 인상파화가들이 썼던 회화법인 병치혼합법과 비교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회화에서 병치혼합이란 눈의 착시현상을 이용함으로써 특정 색채들을 혼합하여 하나의 색깔로 일정한 면적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색상의 점을 연속으로 배치함으로써 마치 혼합된 색상을 보는듯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색상혼합방법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병치혼합법을 통해 객관적인 물리작용인 빛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인간에게 감지되는지를 묘사하는데 주력했으며, 이를 통해 대상의 존재감을 부각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절대 동일하지 않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현실과 더불어, 현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현존이 절대 고정된 실체가 될 수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깨달음을 화풍으로 드러냄으로써 사물의 원형을 그려내는데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병치은유를 통한 재현은 존재 자체를 드러내어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다.
건축에서의 병치은유는 19-20세기에 들어 세계정세의 변화와 함께 나타나게 된다. 19세기 근대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는 철저히 다르며, 산업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주도한 '운동'과 '변화'로 인해 인간 존재가 본질적 소외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서구자본의 급속한 성장, 확산,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가속화로 인해 대도시가 성장하게 되었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관이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하여 19세기 이전까지 지배적이던 모든 보편적 이념과 가치가 무너지고 일회성이 강조되는 역사주의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가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이 가속화됨에 따라서 흘러가는 순간들 사이의 거리가 커짐에 따라 역사적 연속성이 해체되고 근대 세계와 과거의 거리는 현격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거리는 건축에 있어 새로운 재료들, 즉 주철, 강철, 콘크리트, 알루미늄, 합판 등이 나타나면서 건축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함께 건축 표현의 병치은유화로 나타나게 된다.
이에 대한 예시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웅장한 석조건물들이 가득한 19세기 파리의 일반적인 주택 개념을 뒤집어 철근 콘크리트에 의한 '근대 건축의 5가지 요점'으로 일반화한 건축 구성법을 세계 각지로 전파하였다. (1) 필로티 (2) 옥상정원 (3) 자유로운 평면 (4) 수평 창 (5) 자유로운 입면(파사드)으로 구성된 근대 건축의 5가지 요점은 여지없이 기존의 건축에 대한 병치은유이다. 그 이전까지 지속되어 오던 형태가 기능을 지시한다는 치환은유적 사회적 코드에 기반을 둔 건축명제는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는 새로운 명제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렇게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했던 '새로운 정신(에스프리 누보)'은 특히 1923년 라 로슈 주택에서부터 1929년 사보아 주택에 이르는 백색의 주택 연작을 통해 잘 나타나는데, 그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기술 가운데 정제된 시적 감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구를 만드는 것, 즉 수정처럼 순수하고 효율적이며 건강하고 기품 있는 맑고 깨끗한 하나의 도구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자 과제라 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존 건축양식에 새로움과 더불어 존재 자체를 드러내기에 집중하는 병치 은유적 건축 작업이 "건축의 전통에 등을 돌리거나 지역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속에서 자국과 타국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 정신의 인간을 위한 토속적인 보금자리로서 인간의 집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역사와 지역을 꿰뚫는 인간의 정신성에 맞추어졌던 것이다. 이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유토피아적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세계 내 드러냄이며, 치환은유가 갖는 코드를 벗어난 것이다. 이는 현상학자 페레즈-고메즈(Perez-Gomez)가 말한 것과 같이 일상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재를 드러내는 건축으로써 "우리들의 집합적 희망, 완전한 거주의 장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 그의 주장과 공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초기 모더니즘 건축은 철저히 병치은유적이라고만 하기 힘들다. 외적으로는 생략을 통하여 추상적으로 보일지라도 기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란 순수한 기능성으로 돌아가는 것, 곧 실재 그 자체를 표현해내고자 하는 것으로써 진실을 표현해 내는 것과 맞닿아 있었다. 이에 모더니즘 건축이 갖는 의미의 추상성은 그것이 시각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상(象)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남으로써 “플라톤이 말하는 바, 중간단계의 기하학적 영역[ta mathematica]”에 머물게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모더니즘 건축은 외적 병치, 내적 치환의 성격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건축이 생산하는 이미지를 통한 의미작용을 일반적으로 치환은유에 의한 것과 병치은유에 의한 것으로 구분한다면 치환은유에 의한 재현적 이미지는 그 자극이 직접적이고 사회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집단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의 해석 단계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체계 속에서 조직된 논리 내에서의 변용임에 따라 개인적 차원의 개별적 의미작용을 위한 공간은 적은 편이다. 이에 반해 병치은유에 의한 이미지는 치환은유와는 달리 집단적 차원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의미 해석에 대한 여지가 크다. 예를 들어 모더니즘 건축이 내적으로 치환은유적인 성격이 강함에 따라 외적으로 병치은유의 질(質)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집단의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음에 따라 극단적으로 생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하에 병치은유가 드러낼 수 있는 극단적 이중성을 특징으로 하며, 이에 포스트모더니즘 표현의 대표적 방법론인 콜라주가 파편들의 대립적 조합으로 드러내는 의미는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감대를 통해 해석되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적 차원에서 작용되기 쉬운 것이다.
한편, 외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크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이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가 생성하는 이미지들이 구체화와 추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미를 전달하고 확장해 나가며 진실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치환은유는 내포된 원관념을 외시의 보조관념이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구체적 이미지로 재현, 환원시키는듯하지만 실상 거기에는 그 단일한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의미가 내포될 수 있다. 이는 이미지가 시각적 단편만을 의미한다는 제한적 사고에서 벗어날 때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잔느 마르티네는 "한 사물에 대해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 반드시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각을 철저하게 규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사성이 소음 혹은, 소리, 냄새, 미각 사이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MARTINET, J. and 김지은, 2006. 기호학의 열쇠. 서울: 유로. p.81.) 이미지화되어 의미를 만들어내며 지각된다는 것은 인간의 감각의 결에 뿌리 깊게 얽힌 기억과 현재의 삶, 그리고 상상하는 바들까지 복합적으로 이어지며 개인과 집단의 무의식의 차원까지 연쇄적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대적 세계의 진실성이 확보되는 것으로, 이는 표현의 구체화, 혹은 추상화의 단편적 구분만으로는 단정 짓기 어렵다.
안도 다다오는 그의 짧은 건축 에세이 '건축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향해'에서 모더니즘 건축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그의 판단을 보여주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 모더니즘 운동이 타락하고, 관습화되어 재생하는 문화적 힘이라는 스스로 제정한 역할을 팽개쳐 버린 때에 모더니즘의 열악함을 비판하며 일어났다. 모더니즘 건축은 기계적으로 변했고,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은 모더니즘이 버리려 한 것처럼 보인 형태적 풍성함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노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역사, 취향 및 장식을 사용하며- 올바른 방향으로의 발걸음이었으며 건축을 어떠한 구체적 실체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 또한 빠른 속도로 진부한 표현에 갇혀버렸으며, 그 결과 고취적이라기보다는 혼란스러운 형태적 유희의 홍수를 생산해 냈다."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타락한 측면을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이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가져와 습관적으로 복제하거나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닌, 본질적으로 새로운 건축의 창조를 고민하였다. 이에 그가 선택한 것은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하였던 역사와 지역을 꿰뚫는 인간의 정신성, 곧 건축의 관념적 본질이었으며, 그의 건축은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한 건축정신의 치환은유라 할 수 있다. 이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수사적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작용은 건축가의 사상적 위치만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건축 작품에서 표현되는 건축 언어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콘크리트와 철, 그리고 유리라는 제한된 재료의 사용, 형태에서 드러나는 기하학, 그리고 건축에 도입되는 자연적 요소로 크게 특징지어진다. 여기에서 앞의 두 부분, 즉 재료적 측면과 형태적 측면은 다양성의 폭발로 인한 분열과 충돌을 살아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있어 근대건축에 대한 치환은유로써, 또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병치은유로서 현대라는 시대에 주는 의의가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르코르뷔지에가 롱샹 성당으로 알게 된 쿠튀리에 신부의 추천으로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의뢰받은 후 그가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기하학 정신을 도입하여 원시적 사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때 원시적이라는 뜻은 선인들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체험의 원초적 이미지를 말하는 것으로 일원성을 지니는 신화적 세계의 미메시스를 의미한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을 향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울타리와 오두막의 형태 및 성단과 그 부속물들의 위치를 정하면서 본능적으로 직각과 축선, 정사각형과 원형에 의지하였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다른 형태로는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축, 원, 정사각형 등은 기하학의 진수며 우리의 눈이 측정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연적이고 불규칙적이고 임의적이었을 것이다. 기하학은 인간의 언어다."
안도 다다오는 르코르뷔지에로 대표되는 근대건축의 기하학 정신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부활시키려는 노력을 시도한다. 일찍이 쾰러와 코프카의 형태심리학에서와 같이 배경(ground)과 형태(form)는 서로 대조되며 지각을 이끌어낸다고 한 바 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정신성을 제외한 채 그의 건축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앞서 본 것과 같이 배경, 또는 코드를 제하고 의미를 읽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사각형, 원형, 혹은 삼각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는 그가 건축에 대해 갖고 있는 사상적 위치를 상기시키는 외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성, 인간의 근원적 회복을 바탕으로 하는 안도 다다오의 기하학적 표현이라 할지라도 르코르뷔지에의 기하학과 차별되는 점이 존재한다. 이는 기본 바탕이 되는 사상이 같다 하더라도 그가 기하학적 평면과 공간을 다루는 방법이 르코르뷔지에의 방법과는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는 인간의 숙명적 한계, 곧 '죽음'에 대한 사유가 나타난다.
효고현립어린이관이나 히메지문학관, 구마모토현 장식고분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안도 다다오의 평면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도형들은 서로 겹쳐짐으로 인하여 비정형적이거나 비워진 공간이 발생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또한 여러 개의 볼륨이 만날 때 비틀린 축을 통해 공간을 겹치는 방식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기능주의 관점에서 본 근대건축의 기계적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 같은 공간 구성 방식은 기하학이라는 엄정한 질서를 통한 진리를 알 수 없는 외부세계의 혼돈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 혹은 이성의 지배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콘크리트와 철, 그리고 유리 등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재료들의 한정된 물질성에 대한 깊은 고찰과 맞물리어 육신을 타고난 인간의 한계, 곧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숙명을 명상하게 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이 19세기의 근대적 건축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듯하지만 현대라는 시대의 문제를 반영하는 근대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라 할 수 있다. 필립 아리에스는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금지된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라고 한 바 있다.(ARIES, P. and 유선자, 2006. 죽음 앞에선 인간 재판. 서울: 동문선.) 그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태도를 네 가지 형태, 곧 순화된 죽음,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금지된 죽음으로 나눈다. 중세시대 어느 한 고승의 죽음과 같이 예고된 죽음, 누구나 죽는다는 죽음에 대한 순응의 자세, 순화된 죽음은 15세기 이후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의 공유가 아닌, 개인 심판의 의미로 바뀐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죽음은 다시 나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의 죽음, 바로 ‘너’의 죽음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되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보듯 에로틱하고 낭만적인 죽음으로 확장되었다가 근대로 들어오며 죽음은 국립묘지, 국가적 애도행사 등을 통해 집단적으로 기억된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집단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간주하며, 이에 죽음과 그에 동반되는 깊은 슬픔의 감정을 금지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며, 금지된 죽음이란 곧 인간 본질에 대한 고개 돌림이자 억누름이다.
파시스트적 이데올로기화된 죽음의 시대에서 개인의 존엄성은 죽음이라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을 잊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외 없이 누구나 맞이할 죽음, 즉 죽음의 현실성, 죽음의 사실성은 분명히 성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지된 죽음의 시대에서 외치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메시지는 인간됨의 회복에 대한 주장이며 현대에 안도 다다오의 건축이 추구하는 모더니티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절제된 장식과 노출콘크리트 면이 드러내는 꾸미지 않은 물질성이 이루어내는 침묵이다. 그의 건축은 고요하며 정적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의 시간을 속도감 있고 다이내믹하게 표현하는 대신 오히려 그는 원시적인 시간을 재현해 내고 있다. 장식 없이 고요한 벽에는 빛과 어둠이 떨어지고 시간은 이러한 빛과 어둠이 그려내는 움직임을 통해서만 느껴진다. 이는 비워진 공간, 분절된 공간과 공명하여 현재의 삶이 잊고 살기 쉬운 죽음이, 현대에서의 빠른 삶의 속도로 인해 사실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삶과 죽음이 갖는 거리에 대해 묵상하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게 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죽음’의 이미지는 건축으로 끌어들여진 자연적 요소를 통하여 그려지는 생의 체험과 병치된다. 서양 모더니즘에 있어 자연은 늘 극복되어야 하고 지배되어야 하는 통제되지 않는 외부세계였다. 르코르뷔지에의 사보아 주택에 나타난 필로티는 기하학의 엄정한 질서 속에서 자연을 관조할 때만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주택은 자연의 무질서함을 정복함으로써 자연의 모든 가능성을 인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과 기술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안도 다다오는 그의 건축에서 기하학의 질서 가운데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숙명, 죽음을 기억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죽음에 대한 묵상은 존재의 끝이라는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허망함에 대한 토로, 허무주의적 상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구성하는 자연적 요소들로 인해 생의 감각을 이중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자연적 요소들은 일본의 오랜 전통적 방식으로 통제됨으로써 일본의 미학으로 드러난다.
그가 사용하는 자연요소들에는 물, 빛 등 여러 요소들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빛이다. 빛은 그의 건축에서 자연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며 죽음이라는 어두운 이미지에 대조되어 추상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추상적 표현은 삶, 혹은 자연에 대한 연쇄적 이미지들을 생산해 내며 구체와 추상 사이를 넘나 든다.
1989년 오사카 부 이바라키 시에 위치한 빛의 교회는 지름 5,900mm의 구 3개가 내접하는 직육면체에 15도로 경사진 벽이 관입하는 기하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기울어진 벽에 의해 나누어진 예배당의 어둠을 가르는 유일한 빛은 정면에 뚫린 십자 모양의 슬릿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게 된다. 이 수법은 1998년에 완공된 오다 히로키 미술관에서도 반복된다.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자연광에만 의지하고 있는 이 건물에서 ‘빛’은 철저히 통제된 상태로 실내로 유입된다. 전시실은 안과 밖이 모두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건물의 채광은 곡률 1/6의 원호를 그리는 벽을 따라 천장에 설치된 채광창을 통한 빛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제한된 천장의 개구부를 따라 쏟아지는 빛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되며, 이에 따라 벽면을 따라 전시된 그림 작품들 또한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통제된 가운데 스며드는 빛은 공간이 생명을 갖고 자라나가는 생의 가능성을 이미지로 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물리적으로는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공간 속에 우주를 담아내고 거기에는 자연이 더불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내보임으로써 생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빛을 통하여 자연을 극단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 인간의 근원에 닿을 것 같은 심원한 공간과 삶과 죽음의 이중성에 대한 병치적 표현은 삶과 죽음의 주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한다. 그러한 성찰을 위한 건축 표현 방식은 안도 다다오의 문화적 정체성, 곧 일본의 문화를 자양분으로 하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음예공간예찬>>에서 빛을 다루는 일본의 전통방식과 편리와 쾌적함에 대한 일본 미학을 설명한다. 그는 일본의 풍류는 추운 것에 있다고 한 메이지 시대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사이토 료쿠의 말을 빌며 서양의 과학문명이 가져온 실용성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밝고 투명하도록 깨끗하고 빛나는 것들에 반하여 일본의 미는 선명한 것보다는 가라앉은 것, 최신의 것보다는 손 때 묻어 길이 든 것에 있다며 그는 ‘희미한 밝음’, 곧 음예의 미를 찬양한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것은 늘 실제 생활에서 발달하는 것이라 적고 있다. 예로부터 일본 가옥들은 차양이 긴데, 이는 기후 혹은 건축 재료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벽돌, 유리, 시멘트 등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목조로 지어지고 종이로 바람을 막는 일본 가옥들은 들이치는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차양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득이하게 생활 속에 발견되어 길러진 그늘의 아름다움은 그것의 농과 담에만 의지할 뿐 그 외의 모든 장식은 배제된다.
이러한 음예에 대한 일본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은 안도 다다오가 실천하는 건축 언어에 녹아들어 반영되고 있다. 빛의 교회와 오다 히로키 미술관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빛과 어둠의 관계에 대한 일본식 해석은 글라스 블록 하우스나 페스티벌과 같은 작품에서 일본의 격자무늬 창, 노출콘크리트의 섬세한 질감, 다다미방을 연상케 하는 모듈 등의 요소들과 함께 어우러져 극대화된다. 그가 사용하는 기하학적 형태들이 추상적이고 비가시적 요소인 정신성을 반영한다면 실재(the real)를 뜻하는 물질들, 곧 재료들과 자연적 요소들의 체험적 조합은 정신이라는 추상적 요소에 감각이라는 구체성을 더한다. 그리고 이들이 생성하는 이미지들의 연쇄적 연상 작용은 건축이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자리, 곧 터에 대한 지각을 이끌어낸다. 이는 알도 로시가 칼 융에 의지하여 정의한 바 있는 논리적 사고와 유추적 사고의 사이, 혹은 그 둘을 융합한 어떤 곳에 위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논리적 사고는 담론의 형태로 외부 세계에 지시된 어휘들로 표현되는 것이다. 유추적 사고는 감지되지만 비실제적이고 상상되지만 조용하다; 담론이 아니라, 과거의 주제, 내적 독백에 대한 명상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외부 세계가 알고 있는 기하학의 모더니즘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건축에는 일본 건축의 옛 문체가 병치적으로 스며있다. 그러나 모더니즘 건축의 성격은 앞서 살펴보았듯 외적 병치, 내적 치환의 성격을 보인다. 오래된 것과 오래된 것이 만들어 내는 새로움. 그것의 성격은 결론적으로 치환은유적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건축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그의 건축이 충격적인 낯섦보다 압도적이지 않은 은근한 친숙함을 풍기는 이유이다.
수사학적으로 분석할 때, 모더니즘 건축은 외적으로는 근대 이전 시대의 건축 표현에 병치은유로 작용하며, 내적으로는 고전적인 것에 대한 치환은유로 작용한다. 이렇게 볼 때 이에 대립하다 타락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다양성의 시대는 병치은유에서 볼 수 있는 이중적인 것들의 혼재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모호함의 시대 가운데 강조되어 드러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원시적이자 현대적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근대 건축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의 기하학적 건축 언어가 전하는 심층을 살펴볼 때 단순한 쾌적성, 편리성을 넘어 진정한 주거의 풍요로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에 대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도 다다오가 추구하는 편리함, 쾌적함은 최신의 고효율을 자랑하는 기계적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건축이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지각과 터 없이는 거주할 수 없는 잊고 있던 존재의 회복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의 비효율성, 비경제성이 근대 건축의 언어로 지역 전통과 병치적으로 만남으로써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존재에 대한 그의 개인적 성찰을 드러냄은 물론 이질적 성격의 것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중성의 포스트모더니티를 함께 드러내고 있다. 모더니스트라는 그의 정체성은 오히려 포스트모던의 성격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의 건축에서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뿜어내는 낯섦의 분위기를 느끼기 힘든 것은 그의 건축에 녹아있는 창조성이 논리적으로 오래되고, 또 유추적으로도 오래된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차원으로 내려와 있는, 혹은 내맡겨져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배경으로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그 자체가 낯섦으로 존재하며, 그 존재의 의미는 우리에게 친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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