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의 ‘캠프’에 관한 단상
‘캠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뭐라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들다는 데에 동의한 현대 대중문화 용어로서, 혹은 미학 용어로서 캠프는 “과시적이고, 과장되어 있으며, 인위적이고, 연극적인, 혹은 지나치게 여성적이거나 동성애적인” 분위기를 가지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내게 캠프란 흔히 가족끼리, 때론 연인 혹은 지인들끼리 모여 가곤 하는 취미생활로서의 야영, 바로 그것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든 그것의 의미를 부풀려보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해의 시작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경험하게 해 준 캠프는 내가 손택의 캠프로 나아가는 데 있어 작지만 확고한 하나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캠핑용 작은 가스통과 반합이라고 불린다는 조리도구 사진을 보내주곤 하던 그는 내게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하던 창과 같았다. 그가 열어준 일상의 창을 통해 나는 ‘이상한 나라’를 접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그 작은 창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조용히 혼자 앉아 나만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사진에선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달그락. 가스통 위에 차갑고 가벼운 반합을 얹으면 곧이어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퍼지지 않는 열기가 수증기를 피워 올리면 데워진 물은 곧 밥이 되고 차가 된다. 그렇게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다. 비록 한 번도 그 자리에 함께 한 적은 없지만, 그 후로도 그 도구들을 만져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만의 취향과 감수성이 담긴 사진 한 장 한 장은 내게 다가와 각기 다른 세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 공간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생동감으로 가득했다. 난 그 세계 속에서 생각했다. ‘하나하나의 작고 작은 계기를 통해 각자의 세상이 피어오르는 방식이 이토록 감각적이구나’ 하고 말이다.
이들 감각은 마음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자극하기도 했다. 어릴 적 부친은 코펠 세트를 가지고 있었다. 끝이 둥근 손잡이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두서없이 흔들리곤 하던 그 작고 둥글납작한 조리도구들은 서로 부딪힐 때마다 챙그랑 챙그랑, 소리를 냈다. 그걸로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야외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해보려 아등바등 대던 어린 나의 어설펐던 작은 몸짓과 손에 와닿던 차가운 물의 감촉처럼 몸 안에 올올이 새겨진 감각의 결들이 그 몇 장의 사진을 통해 일어나고, 펼쳐짐을 나는 보았다. 지나간 것이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저 멀리의 시간을 만나 서서히 스며들고 뒤엉기기 시작하면, 난 가만히 그러한 감각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혹은 차분히 느끼며, 실제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그 특별한 또 다른 세상 안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다섯 가지 감각이 지어 올린 개인의 취향, 혹은 감수성이라는 작은 세상이 다시 바깥세상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며 말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나의 생각의 절반은 늘 잠겨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볼 때마다 재기 발랄한 피드백을 주지는 못 했다. “생생하고 힘이 넘치는 감수성을 말로 표현해 내기 위해서는 가설을 세울 수 있어야 하며, 민첩해야만” 하는데, 조금은 천천히 떠오르며 부유하는 내 안의 감각 이미지들은 언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바깥세상에 드러나기도 전에 내 안 깊숙이 어딘가를 떠돌다 다시금 자리를 잡고 가라앉아버리곤 했다. 생각의 운동 방식마저도 그렇게 ‘가장 나다운 모습’인 것을 보며, 이 세상에 그보다 결정적인 것은 없다는 손택의 말이, 그러니까 그마저도 자신이 선택한 가장 자유로운 방식의 반응이라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가만 와닿았다.
‘캠프’를, 혹은 개인 내면에 있는 어떤 특정한 ‘감수성’을 말로 포착하여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게끔 전달하는 데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캠프’에 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수잔 손택은 그녀가 ‘캠프’라고 이름 붙인 무엇인가를 묘사해 나감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감수성 가운데 특정한 하나, 한 개인이 가지는 감수성의 하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특수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예시들을 모두 내 것인 듯 뼛속까지 이해하기란 불가능했음을 고백한다. ‘문화와 시대의 장벽’이 넓고 깊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택이 선택한 ‘묘사’와 ‘단상’이라는 표현 방식은 체험을 결정하는 몸을 둘러싼 ‘세계’의 문제와 자기 자신을 장려하는 가장 결정적이고도 가장 자유로운 주관적 반응으로서 ‘취향’의 문제를, 개개인의 주관과 주관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세계, 다시 말해 공감이라는 모종의 중간계로 끌어내 주었다. 오해가 아니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오해일 수 있겠지만, 손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는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은 바로 묘사와 단상이라는 표현 방식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손택에 따르면 묘사와 단상은 취향과 감수성을 말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표현 방식이다. 시대와 사회의 선입견이 묻은 언어라는 틀 안에서 일관되고 논리적으로 논쟁하며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방식으로는 감수성을 다루기 힘들다. “어떤 감수성을 진심으로 공유하는 자라면, 그 감수성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을” 테고, “그런 사람은 의도야 어찌 됐건 그 감수성을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손택은 “체계라는 거푸집에 욱여넣을 수 있거나, 증명이라는 거친 연장으로 다룰 수 있는 감수성은 결코 더 이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사상으로 굳어진 것”일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반면, 그에게 있어 묘사와 단상이라는 글쓰기 방식은 “유별나게 붙들기 어려운” 감수성 같은 것, 대단히 고르지 않게 발전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취향 같은 것을 포착해 내기에 좋은 접근 방식이다. 그 방식은 나선을 그리듯 캠프(혹은 그 무엇이 되었건 전하고 싶은 무엇인가)의 주변으로부터 중심에 서서히 다가간다. 이 과정 가운데 서로 다른 짧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잇따르는 호흡을 느끼는 가운데, 여러 예시를 그때그때 적절하게 끌어오면서 여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하나하나 밖으로 드러내는 유기적인 방식, 그것이 손택이 말하는 묘사와 단상의 방식이다.
그처럼 묘사와 단상으로 손택이 드러내는 ‘캠프’는 물론 내가 사랑한, 나만의 작은 창을 통해 접하던 그의 ‘캠프’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속성으로 보자면 닮은 부분도 확실히 있었다. 나는 ‘모순’이라는 속성에서부터 캠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와 같은 이해의 시작점은 독자 각자의 경험세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삶에서 잠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캠프를, 손택은 윌리엄 엠프슨의 표현을 들며 ‘도회적 목가(urban pastoral)’로 묘사한다. “전원의 속성인 평온함 –혹은 소박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경우도 많”지만, 캠프에 속하는 많은 것들에게는 인공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 어울리지 않는 듯한 양가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도대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유한 분위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무엇인가에 인위적인 것을 더해 가면서 “자연을 지워 없애든지, 아니면 철저하게 부정한다.” 또한, 손택은 그러한 변형, 혹은 개조의 과정이 철저히 감성주의적이며, 과거지향적이라고 말한다. 자연에 더해진 인위, 감성에 의지하지만 철저히 결정적이며 자유로운 의지의 표현, 상상에 기대어 과거로 파고드는 지극히 현재적인 행위로서 이중적이라 할 수 있는 캠프는 그리하여 “양성적 스타일의 승리”가 된다.
손택은 이처럼 캠프가 갖는 이중성, 혹은 양성성을 잡지, 영화, 식당, 만화, 소설, 오페라, 엽서 등등 다양한 예시에 적용하여 구체화한다. 무엇은 캠프이고, 무엇은 캠프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과정이 있기에 독자는 손택이 언급하는 예시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본다 하더라도 내가 손택이 이야기하는 “LA 선셋대로에 있는 브라운 더비 식당”이라든가 “쿠바의 대중가수 라 루페” 혹은 “옛날의 플래시 고든 만화”를 부산 광안리 해변가 뒷골목에 있는 언양불고기 전문 식당이라든가 10대 시절에 보고 듣고 자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든가, 원수연의 순정만화 『풀하우스』처럼 아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가슴 깊이에서 인정한다. 그러나 손택은 예시를 제시함에 있어 아주 너그럽다. 때문에 누구든 손택이 보여주는 수많은 예시 가운데 자신에게 와닿는 한두 가지에서 이해를 시작하면 캠프가 무엇인지에 분명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이해해 나가는 접근 방식을 통한 이해마저도 사실은 안다고 느끼는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중 내가 캠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확실한 닻이 되어 준 예시는 ‘아르누보’였다. 손택은 아르누보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성숙한 캠프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무겁고 강한 주철, 얇고 투명하면서도 딱딱한 유리로 관상용 꽃나무의 모습을 한 조명 설비를 만들어 내는 등 식물적 곡선의 극치를 보이는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사물이 품게 되는 다층적 이미지는 가장 그것 다운 모습 안에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것을 선호하는 캠프적 취향에 기인한다. “이렇듯, 캠프적 감수성은 어떤 것 안에 들어 있는 이중적 의미를 재빨리 알아차리는 감수성이다. 그러나 이 감수성이 마치 각 층마다 마루의 높이가 다른 건물처럼, 한편으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또 한편으로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이는 구조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감수성은 뭔가를 의미하는 사물과 순수하게 인공적인 사물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점이 사물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순전히 어둡기만 한 것, 혹은 순전히 밝고 맑기만 한 것, 그런 것에는 매혹하는 미묘함이 부족하다. 손택은 “캠프를 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유혹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현란한 태도, 다시 말해서 감정가에게는 재기 발랄한 의미로, 문외한에게는 그와는 좀 더 다른 일반적인 의미로 느껴질 이중성이 철철 넘치는 제스처를 행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손택은 “과장, 공상, 열정, 순진함 등이 적절하게 혼합된 것만이 캠프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곡선과 과장된 몸짓, 놀라운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시도는 특별하고 유혹적인 놀라움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놀라움은 때로 “고뇌와 잔혹함, 그리고 광기라는 특징을 지닌 엄숙함”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비일상적 상태들의 비전형적 조합은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러움 등으로 불리며 전통적으로 인정되고 향유되던 ‘고급문화’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창조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런 감수성은, 한편으론 기존 문화에 가해지는 폭력이며, 다른 한편으론 이해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질문이자 구조화된 딱딱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고 종래의 도덕주의, 우아한 내용과는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어색한 파편들로서 “그건 너무 심하다,” “너무나 환상적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등, 캠프적 열정을 표현하는 표준적 문구들로 묘사될 수 있다.
이상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캠프는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것은 삶이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에서 자라난 ‘비정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별한 환상 또한 삶에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 캠프가 인간 본성이 지니는 복잡함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도덕적 타당성으로 납득시키기 힘들고, 극단적이며, 무책임하며, 매혹적이고 연극적인 진짜 삶의 면면은 굳어 있던 일상의 정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캠프적 출구가 된다.
손택은 취향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성격이 대중적이라든가, 조악하다든가, 더없이 평범한 것이라는 것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캠프 취향을 아는 이는 “희귀한 방법으로 그 물건들을 소유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으며, 대중적인 것을 대중적이지 않은 향유 방식으로 취하고 때 묻지 않은 ‘희귀한 감동’을 즐기는 현대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택은 『과잉 교육을 받은 이들을 위한 몇 가지 격언(A Few Maxims for the Instruction of the Over-Educated)』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그러한 현대성의 면모가 ‘예술’로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고 말한다: “삶에서 비정상인 것이 예술에서는 정상적인 것이 된다. 삶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예술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일뿐이다.” 이 관계는 캠프에 뭔가 대단한 상징적 혹은 기능적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 생활 세계의 여러 사회와 모임을 “본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 풍요로움이라는 정신병리를 견뎌 낼 역량이 되는” 곳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여기에는 특정한 기준을 세운 날카로운 판단, 사상적 재단은 지양된다. 다만 더욱 다채로운 취향과 창조적 감수성을 긍정함으로써 때론 변덕스럽고 때론 교묘하며, 때론 고상하고 진지하게 사람의 삶을 자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긍정을 통해 사람은 자유를 얻는다. 그도 그럴 것이 손택의 말을 빌자면 “캠프 취향은 판단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즐기기, 느끼기 방식”이기 때문이다.
“캠프는 너그럽다. 캠프는 즐기고 싶어 한다. 다만 악의와 냉소처럼 보일 뿐이다(혹은 만약 냉소라 할지라도, 그건 무자비한 냉소가 아니라 상냥한 냉소다). 캠프는 진지한 것이 나쁜 취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캠프는 매우 인상적으로 엄숙함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사람에게 코웃음 치지 않는다. 단지 열정적인 실패에서 성공을 찾아내려 할 뿐이다.”
이러하기에 손택은 결론적으로 캠프가 “일종의 사랑,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캠프는 이미 만들어진 취향의 정적 구조에 개인이 타고난 본성을 맞추게끔 강압적으로 요구하거나 넌지시, 혹은 의뭉스레 제안하기보다 끝없이 자아의 본성을 확인하고 긍정하면서 그것을 즐기고, 피워 올리게 한다. “캠프 취향은 자신이 즐기고 있는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이런 감수성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캠프’라는 딱지를 붙인 대상을 비웃지 않는다. 다만 즐길 뿐이다. 캠프는 다정다감한 감정이다.”
앞서 말했듯, 손택이 언급하는 많은 예시들을 다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두어 개에 만이라도 충분히 몸을 적셔 알고 있으면 누구든 이 글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 잠망경 같았던,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창이 되어 주던 그의 사진들을 통해 내가 처음 접한 캠프는 사실 그의 취향이자 감수성의 단편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캠프의 세계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 되어 나를 몽상하게끔 하고 손택의 이 글을 집어 들어 여러 차례 읽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내밀한 취향과 그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력을 깨우고, 이를 바탕으로 나만의 또 다른 감각적 세계를 상상하고 지어 올리게끔 등을 떠밀기도 한 순풍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데 있어 이와 같은 미학 서적들은 실질적인 예술작품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때때로 필요 이상으로 현학적이고 번쇄한 글을 만나게 될 때에는 이 분야에 존재하는 모든 글들에 대해 막연하고도 총체적인 일종의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또 이 글처럼 어떤 통찰과 그것을 표현하는 저자만의 독특한 문체와 방식이 녹아 있는 글을 만날 때엔 잊고 있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거나 몰랐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글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존감이 북돋는 것을 느끼기도 하며, 그처럼 창의적이고도 힘 있는 글쓰기를 ‘나도 한 번?’ 하는 마음으로 시도하고 싶은 자극을 받기도 한다.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예술 평론가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손택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삶 속 작은 창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또한 무엇인가를 보고 느낄 때, 어떤 것을 좋다고 느꼈는지, 일시적으로 순간순간 좋다고 느끼는 많은 것을 어떻게 아끼고 좋아해 나갈 것인지, 나아가 그것이 나의 존재와 어떻게 일치하게끔 가장 결정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로 고양(혹은 하강)시킬 것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람도 그렇다. 처음에는 의심하다가도 시간이 가면서 일정 부분이 반복되면 어느새 당연히 그럴 것이라 판단하고 자기도 모르게 믿어 버렸다가 스스로 발등을 찍을 때도 있고, 어떤 것에서는 이만큼의 이해를 보인 어떤 이가 다른 어떤 것에서는 그러지 않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손택이 말한 것처럼 대단히 고르지 않은 그런 입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캠프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이 다층적으로 섞여 있는 모든 것을 캠프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어찌 되었건 일상의 많은 것들이 이러한 캠프의 경지에서 즐겨질 수 있을 것이다. 편견과 판단, 경계라는 울타리에서 자유로운 캠프 취향은 너그럽고 다정다감하니까 말이다.
Sontag, S. (2018). Penguin Modern: 29 Notes on ‘Camp’, (6th ed.), London, UK: Penguin Random House UK.
글을 한국어로 쓰면서 국문은 손택, S. (2013).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역). 서울: 도서출판 이후. (초판 인쇄 2002)에 수록된 「‘캠프’에 관한 단상」에서 가지고 왔다. 손택의 원래 문체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인용문에 해당하는 원문도 각주에 병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