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읽는 건축

발아래 시간을 상상하는 일

길에 숨겨진 로마의 공학을 들여다보다

by 이민정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발걸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또각또각 울리는 내 구두 소리가 작은 리듬이 되고, 발아래 펼쳐진 보도블록의 반복된 패턴이 오늘 하루의 기분을 은근히 정돈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블록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은 이끼 한 줄이 도시의 틈에서 피어난 작은 생명처럼 이상하리만큼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된다. 무심히 지나치는 이 길에도 누군가의 손길과 숨결, 기술과 의도가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생각, 그런 것 말이다.

이 글에서는 눈앞의 도로가 아닌, 고대 로마인들, 길을 만드는 데 생을 바친 이들의 방식과 사고를 더듬어가며 도로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기술을 따라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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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길은 단순히 돌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층위들이 정교하게 깔려 있었고, 이 층들이 하나의 구조물처럼 맞물리며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작업 순서는 대략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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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땅을 판다

— 카메룰룸(Camerulum) 노반굴착

로마인들은 먼저 길이 놓일 자리를 깊게 파내고 부드러운 흙은 제거해 단단한 지반을 드러냈다. 이 기초가 도로 전체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길은 보통 1m 안팎의 깊이로 파였고, 양옆에는 빗물이 흐를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경사를 만들었다.


2. 큰 돌을 깐다

— 스타투멘(Statumen) 기초층 만들기

가장 아래에는 주먹보다 큰 돌을 촘촘히 깔았다. 이 스타투멘, 즉 기초층은 도로의 흔들림을 막는 첫 번째 층이었고, 무게를 분산시키며 지반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기초층이 흐트러지면 도로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돌 하나하나를 손으로 맞추며 놓았다고 한다.


3. 자갈과 석회를 다져 넣는다

— 루두스(Rudus) 하부기층 만들기

그 위에는 자잘한 자갈과 석회, 모래를 섞은 루두스, 즉 하부기층을 20~30cm 두께로 올렸다. 이 층은 충격을 흡수하고 지면의 진동이 위로 전달되는 것을 막는 일종의 ‘완충 장치’ 역할을 했다.


4. 화산재 콘크리트를 펴 바른다

— 누클레우스(Nucleus) 상부기층 만들기

세 번째 층은 로마 도로의 핵심이다. 포촐라나(화산재)와 석회, 고운 모래를 섞어 만든 혼합물로 오늘날의 콘크리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이 누클레우스, 즉 상부기층이 굳어지면 비와 압력에도 쉽게 깨어지지 않는 탄탄한 ‘하부 포장면’이 된다.


5. 판석을 놓는다

— 숨뭄 도르숨(Summum Dorsum) 노면층 만들기

맨 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바로 그 로마 도로의 모습, 돌판(paving stones)이 놓였다. 이 돌들은 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게 다듬어져 물과 바퀴가 빠져들지 않도록 촘촘히 맞물렸다. 길의 중앙은 약간 볼록하게 만들어 빗물이 자연스럽게 양옆 배수로로 흘러가도록 설계했다.


6. 도로의 양쪽에는 배수로를 만든다

로마인들은 물이 길을 망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로 양옆에는 도랑과 배수구를 파고 빗물이 빠르게 흘러나가도록 했다. 이 배수 구조는 도로 수명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7. 직선에 대한 집착 — 로마 도로의 미학적·공학적 원칙

널리 알려진 것처럼, 로마인들은 가능한 한 직선으로 길을 내려고 했다. 산이 있으면 산을 파고, 늪이 있으면 나무 기둥을 박아 그 위에 도로를 올렸다. 길은 땅의 형태를 따르기보다 제국의 의도를 따라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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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걸어갈 시간을 설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 언젠가 이 길을 밟을 누군가의 무게까지 계산하며 땅 아래에 층을 만들고 돌을 맞추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그들의 손길과는 한결 다르게 만들어지지만, 그들이 남긴 방식은 여전히 발아래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돌 하나를 놓을 때도, 경사를 설계할 때도, 흙이 어떻게 움직이고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세심하게 들여다보던 그 시선들. 그래서일까. 길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발끝이 닿아 있는 표면을 바라보면, 눈앞의 길 너머로 아주 오래된 기술과 마음이 겹겹이 겹쳐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다시 걸을 땐 가끔 상상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내가 딛고 있는 이 길 아래에도 크고 작은 돌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을지, 보이지 않는 완충층이 조용히 충격을 흡수하고 있을지, 비가 오면 어디로 흘러가는 경사가 숨어 있을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표면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손길과 계산과 시간의 켜가 숨어 있다. 길은 그저 지나가라고 놓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공력과 배려가 조용히 포개져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발걸음이 조금 느려지고 길 위의 사소한 것들이 새로운 표정으로 보이곤 한다.


걷는다는 일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층들을 향해 조용히 인사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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