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은 민주적일 수 있는가
건축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묻는 일은 결코 새롭지 않습니다. 고대부터 정치 체제와 공간 형식 사이의 관계는 반복적으로 사유되어 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체제에 따라 요구되는 공간 형식이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과두정이나 일인 지배 체제에서는 요새화된 상부 도시, 즉 ‘아크로폴리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고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상징적 방어 장치로서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민주정에는 그러한 고지의 요새가 아니라 시민의 삶과 직접 맞닿은 지상, 곧 그라운드 레벨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알베르티 역시 정치권력의 성격에 따라 적합한 건축 유형이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정당한 통치자의 거처는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며 접근이 쉽고, 우아하고 세련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요새가 아니라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 폭군의 거처는 집이 아니라 요새이며, 도시 안도, 밖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입니다. 선한 왕의 거처가 광장이나 사원, 귀족의 주거와 인접할 수 있다면, 폭군의 거처는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 이러한 논의는 더욱 명시적으로 전개됩니다. 특히 미국의 건축가들은 건축과 민주주의를 직접 연결하려는 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루이스 설리번은 고층 건축의 선구자이자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문구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단순한 기능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건축을 민주주의라는 더 큰 신념 체계의 일부로 보았으며, 민주적 사회는 결국 자신에게 적합한 건축적 표현 형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사유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로 이어집니다. 라이트는 민주적 건축이란 긴장하거나 위압하지 않는 건축이라고 말합니다. 민주적인 건물은 편안하게 서 있으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인간적 스케일을 지니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며 집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나 이념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이 실제로 머물고 살아가는 공간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라이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연방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해 민주적 사회의 기반이 될 공간 형식을 탐구할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 청원에는 존 듀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과 건축가들이 동참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정치 체제에 그치지 않고 공간과 형식의 문제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좀 더 최근의 사례로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민주적 건축을 비용과 접근성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값비싼 건물을 설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건축을 만드는 일은 어렵다고 그는 말합니다. 민주적 디자인이란 6억 달러짜리 콘서트홀이 아니라 6천만 달러짜리 콘서트홀을, 1만 달러짜리 의자가 아니라 600달러짜리 의자를 만드는 일이라고요.
이처럼 오늘날 건축가들은 스스로 자신의 건축을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건축은 단지 지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말해지고 해석되는 담론의 대상이 됩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라는 언어는 현대 건축 담론에서 거의 상투어처럼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담론은 과연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가, 아니면 단지 수사에 불과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건축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보다 엄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 앞에는 두 가지 강력한 우려가 놓여 있습니다. 첫째, 건축은 본질적으로 권위적이라는 주장입니다. 건축은 언제나 권력과 결부되어 왔으며, 그 기원부터 제국의 논리와 함께했다는 시각입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되었다는 사실은, 건축이 제국 권력의 확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둘째, 건축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의적이라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건축이 사회의 이상적 영혼, 곧 명령하고 금지할 권위를 가진 힘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대성당과 궁전, 국가 기념물은 사회 질서를 강요하고 침묵을 요구합니다. 바스티유 감옥의 파괴가 상징적 사건으로 남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건축은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건축은 늘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는 권력의 형식이었고, 사람들 위에 군림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성급합니다. 건축 환경이 인간의 행위를 제약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를 낳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도와 공간은 억압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여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듯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그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건축이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라는 주장과는 다릅니다.
몽테스키외가 지적했듯, 공화국의 통치자들은 제도를 만들고, 이후 그 제도는 통치자들마저 형성합니다. 정치이론에서 제도는 단순한 제약 장치가 아니라 특정한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최근에는 ‘아키텍처’라는 말을 건물에 한정하지 않고, 사람들이 행동하고 선택하게 되는 환경의 구조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의 작동 방식이나 각종 제도와 규칙 역시 하나의 아키텍처로 이해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더라도, 어떤 선택이 더 쉽게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는지에 따라 실제 행동은 달라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선택적 아키텍처’란,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를 유지한 채로도 특정 방향의 결정을 더 쉽게 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뜻합니다. 구조가 잘 짜여 있을 경우, 사람들은 강요받지 않으면서도 좀 더 합리적이거나 바람직한 선택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환경과 구조는 단순히 사람들의 행동을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장치만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동시에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구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구조가 어떤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건축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건물의 의미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모든 의미가 동등하고 자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파시즘 건축을 둘러싼 의미 구성과 민주적 건축을 둘러싼 의미 구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제 질문은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건축 환경의 관계를 어떻게 물을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장 직관적인 접근은 민주적 건축 환경이란 민주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환경이라는 생각입니다. 시민 참여와 공론장을 통해 설계가 이루어지면 민주적 공간이 탄생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접근은 여러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무역센터 재건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도시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이름 아래 대규모 참여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누가 참여해야 하는지는 끝내 명확해지지 않았습니다. 뉴욕 시민만이 이해관계자인지, 희생자 가족이 특별한 발언권을 가져야 하는지, 미국 전체 혹은 전 세계가 이해관계자인지에 대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결정은 참여 과정과 무관하게 내려졌습니다. 최종 선택은 뉴욕주 주지사의 즉흥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졌고, ‘프리덤타워’라는 명칭 역시 정치적 제스처로 제안되었다가 이후 철회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참여의 양과 절차가 민주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사회과학 연구들은 대중 참여가 종종 이미 특권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공청회와 주민투표는 시간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며, 평소 배제되어 온 이들의 목소리를 실질적으로 증폭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오늘날의 도시 개발 구조가 겹쳐집니다. 현대의 건축은 대부분 사적 이해관계, 특히 민간 개발자에 의해 주도됩니다. 이 구조 속에서 시민 참여는 흔히 설계 과정의 일부로 포함되지만, 실제로는 핵심적인 결정 권한과 분리된 채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회의에 초대되고 의견을 제시하며 참여하고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정작 공간의 성격을 좌우하는 판단은 이미 다른 곳에서 내려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때 참여는 결정을 바꾸는 행위라기보다,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는 절차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일부에서는 ‘파르티시테인먼트(partici-tainment)’라고 부릅니다. 참여(participation)와 오락(entertainment)이 결합된 이 표현은, 참여가 실질적 권한을 수반하지 않은 채 연출과 경험의 수준에 머무르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과정은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결정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참여는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불만을 완충하는 역할에 그치게 됩니다. 그 결과 참여는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라기보다, 민주적으로 보이기 위한 형식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물론 참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전후 유럽의 일부 사례에서는 학생이나 사용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실제 설계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조건이 그러한 방식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를 과정과 참여로만 환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여는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따라서 질문은 다시 돌아옵니다.
민주주의는 어떤 공간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가. 어떤 형식, 어떤 공공성의 구조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민주주의는 투표와 회의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함께 존재하고, 마주치고, 충돌하고, 견디는 공간 속에서 비로소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공간이 사라질 때, 민주주의 역시 서서히 형태를 잃습니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공공공간의 문제가 민주주의 논의의 중심에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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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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