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두려움

by 이민정

영업 조직에 있다 보면 이유 없이 작아지는 날이 있다. 딱히 크게 거절을 당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실패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두려움이나 불안 같은 감정이 몸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고, 숨이 얕아진다. 그러면 머리는 곧바로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어떤 역량이 부족했는지를 따져 묻는다. 거절, 실패, 부진 같은 단어들이 자동처럼 떠오르지만, 조금 더 솔직해지면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정작 나를 더 흔드는 것은 ‘꺾이는 순간’이 아니라 ‘고요한 상태’다. 달리 보여줄 것이 없는 상태, 설명할 숫자도 내세울 결과가 없는 날, 그 조용한 공백이 나를 위축시킨다. 성과는 설명이 된다. 성과가 좋으면 나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고, 타인의 질문을 잠재울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증명 가능한 실패조차도 일종의 서사를 제공한다. 시도했다는 이야기, 과정이 있었다는 설명, 다음을 도모할 근거가 생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고요한 날은 다르다. 그날은 나를 변호해 줄 언어가 없다.


문득 아이러니가 떠오른다. 한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을 집요하게 의심한 적이 있다. 끝없는 성장과 확장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과연 타당한가,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이 혹시 현실을 미화하는 수사는 아닌가를 묻곤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성과의 지속가능성을 나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다. 끊임없이 보여줄 것, 계속해서 증명할 것, 멈추지 말 것. 성장 곡선이 잠시라도 완만해지면 불안이 스며든다. 성과가 멈추는 순간 따라붙는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날카롭다. 마치 존재가 조금씩 옅어지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내가 투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숫자가 줄어들거나 결과가 보이지 않는 날에는 내 밀도가 낮아지는 것 같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이고, 작업은 세계에 남는 것을 만들며, 행위는 타인과 관계 맺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과 작업의 결과를 곧바로 존재의 가치로 환산해 버린다. 얼마를 벌었는가, 무엇을 만들었는가, 어떤 결과를 냈는가. 이 질문들은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 “너는 누구인가”를 대체해 버린다. 그때 성과는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이 된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사물로 만든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대상이 된다고 말했던 게 사르트르였던가. 성과는 그 시선이 구체화된 형태다. 평가, 숫자, 직함, 이력은 나를 설명하지만 동시에 나를 고정한다. 성과가 좋은 순간 나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성과가 멈추는 순간 나는 ‘애매한 사람’이 된다. 물론 이 정의가 존재 전체가 아니라 상황의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그 단면을 전부로 믿어버린다. 성과가 나를 대표한다고, 나의 밀도를 결정한다고, 심지어 나의 가치를 판정한다고 받아들인다.


성과는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은 세계 속에 나의 흔적이 남았다는 감각을 준다. 그렇기에 성과가 멈추는 순간, 세계와의 연결이 약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 감각이 불안을 낳는다.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가.” 이 질문은 실적표의 문제라기보다 존재론적 질문에 가깝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 보면, 성과는 내가 하는 일의 결과이고 존재는 그 일을 하기 이전부터 이미 주어져 있다. 성과는 변동하지만 존재는 변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존재를 성과에 저당 잡혀 둔다. 성과가 잘 나오면 안도하고, 멈추면 흔들린다. 마치 존재의 스위치가 숫자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이 순서가 뒤집혀 있다. 성과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아직은 지는 게임. 엎어질 때마다 엎치락뒤치락.. 힘에의 의지…!


그래서 가끔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정신건강을 위하여. 숨쉬기 위하여.

보고하지 않는 하루,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노력, 숫자로 기록되지 않는 존재의 시간을 일부러 견뎌보는 것. 그 시간에 불안이 올라온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의존해 온 구조의 윤곽일 것이다. 성과가 없는 날에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감각을 천천히 익히는 것. 그 감각이 단단해질수록 성과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정체성이 아니라 도구로, 존재의 조건이 아니라 활동의 결과로.


고요한 날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아마도, 보여줄 것이 없어도 내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아는 날일 것이다. 그때 비로소 성과는 나를 지배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다루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나는, 숫자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 위에 서게 된다.


숫자가 줄어들어도 존재의 밀도가 함께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고요한 순간에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겠지..? 성과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전심으로 감사하며, 비로소 나 자신과 평화로워지는 날. 나는 숫자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 위에, 흔들림 없이 서는, 그런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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