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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Jan 05. 2024

2024 민자기

자주 보는 기쁨의 나날을 꿈꾸며

언니가 보내준 새해 문자 메시지



민자기.


언니가 나를 부르는 애칭이다. 15년 정도 알고 지내면서 언젠가부터 언니는 가끔 나를 민자기라 부른다. 이름을 불러줄 때도 있지만,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민자기" 하면  예상치 못한 호칭에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모르게 "응?" 하는 대답보다 웃음이 먼저 나온다.


거의 2년 만에 언니를 만났다. 언니 아들 애칭은 초록이. 안경 만지기를 좋아하는 초록이는 내가 쓴 안경을 잘못 만져 다치게 할까 봐, 만나자마자 "이모, 안경을 벗어주세요"라고 했다. 귀여운 새싹. 초록.


오래전부터 언니는 내게 그림동화, 소설, 에세이, 시집 등 감성이 흐르는 책을 소개해주고 빌려주거나 선물로 줬다. 가끔 "종종 그 책 있잖아.." 하고 함께 나눴던 책 이야기를 한다. 서로 이야기 나누었지만 같이 기억하지 못하는 책도 있다. 그럴 땐 먼저 기억해 내는 사람이 알려주기로 한다.


이번에 만날 때 나는 내가 아끼는 책 두 권을 가지고 갔다. <<은하철도 999 우주레일을 건설하라>>와 <<마징가 Z 지하기지를 건설하라>>. 일본 토목건설 전문업체 마에다건설이 사내에서 각 분야별 최정예 전문가를 차출하여 '판타지 영업부'라는 이름의 신설부서를 만들어 실제로 실행한 두 개의 프로젝트이다. 사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오타쿠 같나 싶어 진짜 친한 사람이 아니면 좋아한다 말하는 것도 주저하게 되지만, 프로젝트에 임하는 마에다건설 판타지 영업부 부원들의 진지함이 녹아 있는 이 두 권의 책은 내 찐 사랑이다.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게 뭐야? “

“재밌겠다. 요즘 책 정말 안 읽는데 노력해 볼게. 하하" 그랬다.

 

언니는 내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있을 때 친구 두 명과 런던을 들렸다가 내가 사는 벨파스트를 여정에 끼워 넣어 내가 사는 집에서 묵고 간 적이 있다. 그날 오후 늦게 집에 오기 전에 둘러보았던 벨파스트 구 시가지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고 한다. 버킷리스트를 만든다면, 거길 다시 가보는 게 목록에 들어갈 거라고 했다.


그날 언니와의 기억을 되감으면 나는 언니와 함께 했던 산책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골든 레트리버 종 어린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언니랑 그 애랑 같이 집 근처 숲에 산책을 갔던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다. 그날 하늘은 늘 그저 그런 우중충한 벨파스트 하늘이었다. 온통 뒤덮은 허연 구름 뒤편에서 쏘는 햇살에 회색빛 하늘이 형광등처럼 희덩그레 빛나던 날이었다.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여행을 한 언니는 풀어놓은 단발머리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나는 질끈 묶은 머리에 진회색 긴 바지에 푸른빛 긴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알리라는 이름의 강아지는 자꾸 목줄 길이보다 더 튀어나가려고 애썼고, 산책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바람  덕에 풀어놓은 언니 머리, 질끈 묶어놓은 내 머리, 누구 머리 할 것 없이 날릴 수 있는 머리카락이란 머리카락은 모두 삐져나와 저대로 신나게 춤을 췄던 날이다.

그날

지금 대화를 하면서도 지나간 기억에 머무른다. 일상 속 양자역학이 여기 있는 건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메뉴는 파스타였다. 그 직전 함께 했던 식사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5-6년은 뒤로 또 뛰어가야 하여 기억을 못 하는데, 언니는 내가 국물 음식을 좋아하는 걸 잊지 않고는 생태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난 역시나 건더기는 거의 남기고 국물만 다 먹었다.


데니스가 새끼 고양이었을 때 만났던 언니는 냥이 안부를 물었다.


"작년 여름에 죽었어."


"그렇구나. 새끼 때 봤는데."


그리곤 별말 없이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언니는 디카페인, 나는 카페라테.


연구원이었던 언니는 이제 연구용역을 하는 사업자다. 멋쟁이.

난 겁이 나서 사업자를 낼 엄두도 못 낸다 했다. 언니는, 나도 그랬는데- 영 필요해서 해보니 정말 별 거 아니더라- 그런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중간중간에 큰 구멍들이 있는 엉성한 니트 같다. 우리 관계는. 그러나 그래서 풍덩하고 바람이 술술 들어오면서도 따뜻하니 편안하다.


헤어지는 길. 언니는 오후에 초록이랑 버스 여행을 간다고 했다. 시내버스 하나를 잡아 종점까지 갔다 오는 여행이다. 지난해부터 활발해진 이 여행방식으로 언니는 어느 때보다 부산 지리를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도 빠삭하고. 언니가 좋아해서 시작한 건 아니다. 초록이가 버스를 타고 길을 그리는 걸 좋아해서이다.


건축을 공부한 우리는 아이를 도시 쪽으로 공부를 시키자고 했다. (하하하 -_-)


건강하자.


마지막 인사는 그랬다.


언니.


언니도 건강해.


나의 인사는 그랬다.


또 봐.


언니가 내 등을 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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