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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May 07. 2024

어린이날과 이사와 엄마와 가루가 된 친구 생각

학교에 도착했다. 


새벽 1시.


출근을 위해 다음날 새벽에 갈지 전 날 밤에 갈지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내 몸 상태에 달려 있다. 저녁 9시쯤 됐는데도 곧 곯아떨어질 것처럼 노곤한 느낌이 없으면 밤 12시까지는 그냥 깨 있을 확률이 높다. 학교까진 세 시간 반을 운전해야 하니까, 다음날 새벽에 가기 위해선 새벽 3~4시 사이에 일어나야 하는데, 자정까지 깨 있다가 새벽 3~4시에 일어난다는 건, 아예 다음 하루를 망쳐버리겠다 결심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냥 9시에 바로 출발한다. 그렇게 하면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몸이 괜찮으면 달리기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그러나 저녁 9시에 노곤노곤 정신이 저기 어디론가 멀어지고 있으면 그냥 마음 놓고 잠들어버린다. 잘 자면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아서 상관없다. 어느 순간 가기 싫냐 좋냐의 마음 상태는 한 발자국 뒤로 밀렸다. 하루하루 매일이 소중하고, 난 오늘을 설쳐 내일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냥 몸 상태 따라- 단순하다.


이번 주말은 어린이날과 대체 공휴일이 있는 연휴 주말이었다. 학생들에게는 귀가하는 주이기도 했는데, 학교에서 5일씩 집에 보내기는 싫었는지, 보통 귀가주엔 목요일 점심에 보내는데, 이번엔 금요일에 보내서 4일을 동일하게 맞췄다. 덕분에 난 금요일을 일했다. 잠시이긴 했지만.


토요일엔 이사를 했다. 전부는 아니고 큰 짐 위주로. 남편은 일 때문에 바다 건너 있었고, 이미 잡아 놓은 일정을 변경하기 힘들었다. 나도 매일 시간이 있는 건 아니라서 계획되어 있을 때 하는 편이 불필요한 추가적 고민거리를 줄여주기에 그냥 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하루 종일 비가 왔고, 쉽지 않았다. 기사 한 분이 오셨는데, 내가 도와야 하는 수준은 거의 동등한 작업자로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거기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크고 무거워도- 아니, 크고 무거울수록 요령으로 해야 한다 생각하니 머리 쓰는 건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움직이기 전에 동선을 살피고 테트리스 짜는 걸 도와드리면 됐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힘을 내는데, 힘이 들었지만, 도저히 못 하겠다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루 정신 차리고 하면 끝나는 거니까.


짐 옮겨주시는 기사 분은 성격이 좀 급했다. 싹싹했지만, 순간순간 짜증을 잘 내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교사 일도 몸이 많이 힘들지만 딱히 감정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은 몸에게도, 정신에게도 효용이 없다. 그럴 거 같으면 차라리 긴장하고 화내는 몸에 자꾸 힘을 풀고 생글생글 웃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처럼 똑같이 해보았다. 폭우가 쏟아졌지만, 기사 분은 바쁜 일정 중에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하루에 두 번이나 와주었고, 일도 잘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짐은 날랐지만 모든 짐을 정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엄마가 아프면서 대학병원에 장기 입원하게 됐을 때 하루는 엄마가 그랬다. 

"민정아, 엄마 집을 슈퍼마켓이라 생각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찾아보고 갖다 써."

엄마가 마지막 치료받는 6개월 정도 사이에 그 '슈퍼마켓'엔 두 번 정도 가본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일단은 너무 슬펐고- 집엔 섣불리 들어가지도 못하겠거니와 정리할 엄두가 도저히 안 나서 결국 죽은 사람 집을 청소해 주는 서비스를 비용을 주고 불렀다. 너무 많았던 물건들. 

엄마가 수집광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다고 엄마 물건이 적은 편도 아니었지만- 한 사람의 흔적이 물건들이란 사실이 당혹스러웠던 것 같다. 다 버려 달라고 하고 빈 집에서 한참 있었다. 울었던가 멍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 난 내가 혼자 살던 집을 참 이상하게 만들었다. 방 세 개짜리, 우리 가족이 예전에 함께 살던 때처럼, 그런 집을 구해서- 방방에 적당한 가구를 넣고, 거실도 꾸미고- 식탁은 심지어 6인용에 그릇들도 접대용으로 샀다.


엄마도 돌아가시고, 난 혼자 살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면 뭔지 모를 그 뭔가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뭐에 씌었던 것처럼 이상한 행동인데, 그렇게 3년 정도- 나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는 집을 이리 꾸미고 저리 꾸몄다. 3-4일에 한 번씩, 꽃도 사서 싱싱하게 유지했고 일주일에 두어 번 바꿨다. 그러고서 어느 날, 그 모든 게 다 부질없고 온당치 않게 느껴져 다 버린 후 커다란 방 하나의 공간으로 갔다. 이제 더 없어도 상관없었다 느꼈던 것 같다. 그걸 뭐라 부르든지. 책도 한 번에 다 버렸는데, 결국 그러고서 버린 책들은 하나둘 다시 다 사모으게 되었지만, 여전히 없는 책도 달리 아쉬울 것은 없다. 


이번 어린이날은 엄마 없이 보낸 8번째 어린이날이다. 마지막 어린이날 선물은 엄마 돌아가시기 두 달 전이었다. 그날 아침 전화가 와서 "민정아, 어린이날인데 맛있는 거 사 먹고 재밌게 놀아라." 하시면서 다음에 오면 너 줄 엄청난 선물을 사놨다 하셨다. 뭐냐고 물으니 선크림과 치약이라고 했다. 

뭐가 됐든 대학병원 3인실에서 어떻게 쇼핑을 했는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다단계 방문판매상이 병실마다 돌면서 환자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었다. 혈액암이었던 엄마는 이미 뇌에도 암이 전이된 상태였고, 뇌가 부풀어서 뇌의 압력을 낮춘다고 머리뼈에 작은 구멍을 낸 상태였기 때문에, 정신이 한 번씩 오락가락했다. 그런 환자에게 영업을 하다니. 난 속으로 치를 떨며 분노했지만, 그 누군가 어디에도 표현하진 않았다.


한 달 전쯤 신경외과 질환이 생겨 혈액검사를 받았다. 적혈구가 그렇게 건강한 상태가 아니란 말을 듣고 혈액암 엄마 생각이 났다. 그러고서 약 먹고 다행히 나아서 난 또 즐겁게 살고 있지만-

엄만 이번 어린이날에 내게 무슨 말을 해줬을까. 이제 좀 오래전이라 자꾸 미화되는 것만 같다. 무섭고 화내던 엄마도 기억하자 -_-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나는 현장에 없는 남편을 생각하며 고맙다 생각했다. 다른 게 아니라, 남편이 기억을 정리하는 방식 때문이다. 

나는 새끼 고양이 때 데리고 와서 데니스라고 불렀던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16살이던 지난해 여름에 그 녀석이 죽어버렸다. 남편과는 마지막 2년을 같이 살며 놀았다. 데니스가 죽고 나는 데니스를 화장했다. 남편은 데니스를 이제 '가루가 된 친구'라고 부른다. 유골함은 납골당 어딘가에 두지 않고 집에 있다. 멀리 많은 시간을 머무는 곳에 갈 때에도 함을 잘 데리고 간다. 데리고 가지 못했다가 오랜만에 보게 될 때엔 인사했냐고 묻는다. 그러면 함을 싸고 있는, 리본 매듭이 된 공단 천을 톡톡- 고양이 머리 탭 하듯 만지며 아는 척하기도 한다. 

그 애가 먹던 간식 츄르  남은 거나 화장실, 물통, 장난감, 빗, 밥그릇, 박스로 만들어진 노묘용 계단 등은 아직도 다 가지고 있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엄마 때처럼 한 번에 다 정리해야 하는 줄로만 알고 길어봤자 두어 달 당황스러워하다가 다 버렸을 것이다. 남편은 내 이야기는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하지만, 함부로 정리하지 말라고 한다. 물건들이 내 옆에 있으면 엄청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좋은 방식으로 추억한다. 가끔 우리 둘이 그 애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기도 하지만, 또 바로 '가루가 된 친구'하면서 웃는다.


가루가 된 친구. 엄마도 데니스도 보고싶다.


이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와르르 쏟아 적었다. 이틀 연달아 자주 뵙지 못하는 어머님 아버님과 식사하고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어머님 말씀 대로 '적자생존'인가..


쏟아내고 나면 괜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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