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는 건축

고대인, 바다에 뛰어들다

by 이민정

바다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들

상상해 봅니다.

한여름의 바닷가,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처럼 바닷물에 몸을 던졌을 것입니다. 해변에서 모래를 밟고 뛰놀다 바닷속으로 들어가 숨을 참고 물고기를 기웃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스크 하나 없이 소금기 가득한 바닷속에서 오래 눈을 뜨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을 겁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따가움에 금세 수면 위로 올라왔을 그 장면이 자연스레 그려집니다.

어쩌면 그들은 물고기나 소라를 잡으려는 마음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중의 시야는 제한적이고, 겨울 바다는 더욱 가혹합니다.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차가운 물속에서는 15분 남짓 지나면 저체온증 위험이 닥친다고 하지요. 그러니 오늘날처럼 장비와 지식으로 무장해 안전하게 바다를 즐기는 것은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상상을 멈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현대의 다이버들이 웨이트벨트와 넥웨이트를 차고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듯, 신석기인들 또한 해변에서 주운 돌멩이나 바위를 들고 내려갔을지 모릅니다. 저 또한 다이빙을 할 때 목에 작은 납 덩어리를 걸고 내려가는데, 그 무게가 몸을 눌러 바닷속으로 데려가 줍니다. 신석기인의 손에 들린 돌멩이도 그런 역할을 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고고학은 언제나 냉정합니다. 돌이 발굴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이빙에 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닷가에는 돌이 늘 널려 있었으니까요. 바구니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손으로 엮은 바구니는 소금기에 쉽게 상하거나 부패했을 테니, 수중 채집용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날을 세운 석기는 사냥과 채집, 생활 전반에 두루 쓰였을 테니까요.

결국 고고학자들의 결론은 모호합니다. 직접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여전하다. 연안에서 살아가던 이들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숨을 참고 바다에 들어가 식량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 알 수 없음과 가능성의 사이, 바로 그 중간 지대가 상상의 여백을 낳습니다. 확실한 사실보다 더 매혹적인 지점은 오히려 그 여백 속에 있습니다.

만약 그 시대에도 오늘날의 해녀처럼 바다에 몸을 던진 이들이 있었다면, 바위틈에 숨어 있는 소라와 조개, 해초 사이의 물고기를 거두어 올렸을 것입니다. 바닷속 지형에 익숙한 다이버는 자신이 먹을 양뿐 아니라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식량도 얻었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저체온증을 감수하고 바다 깊숙이 들어갔을 것이고, 때로는 위험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알 수 없는 것은 합리적 추론과 상상, 두 영역의 교차로에 남겨질 뿐입니다.


조개와 고둥이 남긴 흔적

신석기인의 바다를 그려본 상상에서 벗어나면, 고고학은 보다 구체적인 흔적을 보여줍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사람들이 단순히 뭍에서만 살아간 것이 아니라 숨을 참고 바닷속으로 들어갔음을 은연중에 증언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땅, ‘강들의 사이’라는 뜻을 지닌 메소포타미아. 그곳에서 기원전 4500년경의 고둥껍데기가 발굴되었습니다. 단순히 해변에 떠밀려온 조개가 아니라, 다이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종이었습니다. 새의 머리로 조각되고 청금석으로 장식된 이 껍데기는 램프나 제의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고둥껍데기’라는 점입니다. 누군가 바닷속에 들어가 숨을 참고 건져 올린 흔적이지요.

고대 우르 조개 램프 혹은 신주 용품. 이미지: 대영박물관

표범 모양의 조개 부적도 흥미롭습니다. 조개껍데기를 깎아 표범의 몸과 점박이 무늬를 표현한 이 부적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신성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수메르 여신 이난나와 연결된 표범은 힘과 풍요의 상징이었고, 그것이 조개껍데기로 빚어졌다는 사실은 곧 바다에서의 채집을 의미합니다.

표범 형태의 메소포타미아 조개 부적. 이미지: Artemis Gallery, Lot 43, Auction 4/6/2023
이난나 여신 부조. 이미지: 대영박물관

또 다른 증거로는 ‘우르의 깃발(Standard of Ur)’이 있습니다. 1928년, 영국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가 우르 왕실의 묘지를 발굴하던 중 발견한 이 작품은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600~24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 장식판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나무판 위를 유리와 조개껍데기로 장식해 세 겹의 장면을 펼쳐놓았습니다. 진주조개껍데기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쓰였고, 청금석은 배경을, 붉은 사암은 장식 효과를 위해 쓰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장식에 사용된 진주조개가 수심 깊은 곳에 서식하는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누군가가 바닷속으로 잠수해 그것을 채집했음을 시사합니다.

우르의 깃발. 이미지: 대영박물관

고대 언어에도 사람들이 물속을 오갔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수메르어의 ñiñri는 다이빙을 뜻하는 동시에 ‘가라앉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언어 속에 남은 이 단어는, 바닷속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의 몸짓이 기억으로, 그리고 말로 남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흔적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인류는 언제나 물 옆에 살았고, 물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바다에서 조개를 건져 올리던 신석기인, 강의 비옥함에 의지해 도시를 세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 나일강의 범람에 삶을 건 이집트인까지. 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존의 토대였고, 반드시 곁에 두어야만 하는 자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마셨고, 물을 건너 교류했으며, 때로는 물속에 몸을 던져 식량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의 곁에서 마을을 짓고,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일구었습니다. 건축은 그 순간부터 물을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였습니다. 우물과 수로, 저수지와 목욕탕, 신을 위한 성전까지. 물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사람과 건축을 함께 살아 움직이게 한 힘이었습니다.

바닷속에서 조개를 줍던 숨 가쁜 신석기인의 몸짓에서, 고대 문명의 유물과 강변의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물은 곁에 두어야 하는 생존의 조건이자, 삶을 담아내는 건축의 영원한 주제였던 것입니다.


이제 시선을 이집트로 옮겨 보겠습니다. 기원전 3200년 무렵, 제6왕조 시기의 테베에서는 조개 장신구가 유행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간조 때 수집되는 별보배고둥은 부적과 장식품으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입뿔고둥은 붉은색 염료의 원료로, 진주조개는 장식 재료로 채집되었고, 해삼과 조개는 교역품이 되었습니다. 홍해의 해양 산물들은 기원전 3천 년대의 이집트 경제에서 중요한 교역 대상이었습니다.

테베에서 발견된 금과 준보석으로 만든 별보배고둥 부적 목걸이. 이미지: 대영박물관
붉은색 염료 제조원 입뿔고둥.

조개는 건축 재료로도 활용되었습니다. 2009년, 시나이 사막의 유적에서 15미터 두께의 진흙벽이 조개껍질로 보강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조개를 단순히 장신구나 교역품으로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토목과 건축에 적극 활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수에즈 운하의 동쪽에 있는 콴타라에서 발견된 고대 이집트의 요새 '텔 헤부아'

어업 또한 다이빙을 필요로 했습니다. 유인망을 깊이 던져놓으면, 망이 걸리거나 고기가 잡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는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기원전 2100년경, 안크티피(Anktifi)의 무덤 벽화에는 나일강에서의 어업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에 보이는 사람은 다리가 하늘로 가 있습니다. 다들 배에 있으니 물 위일 것이기 때문에, 다이빙을 하고 있는 장면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한 사람은 다리를 위로 치켜들며 잠수하고, 또 다른 이는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배 위에 남아 있는 동료들과 대비되며, 다이빙이 실제로 어업 활동의 일부였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나일강의 악어와 같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생존을 위한 노동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그리스, 물을 문화와 건축으로

이제 고대 그리스로 장소를 옮겨보겠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와 함께 살아온 민족이었습니다. 무려 4,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영과 다이빙을 이어왔다고 알려져 있지요.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수영은 단순히 익사를 피하기 위한 생존술이 아니었습니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전쟁을 치르는 데에도, 교역과 어업을 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기술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삶의 방식을 자부했습니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수영을 할 줄 아는 그리스인들이 오히려 우월하다고 생각했지요. 수영을 모르는 사람들을 아직 깨우치지 못한 야만인으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수영은 그리스인들에게 곧 ‘교양’이었습니다. 플라톤의 문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글도 모르고, 수영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과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을 같은 수준의 교양으로 보았다는 사실,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리스의 해양문명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시작에는 크레타 섬이 있습니다. 미노아 문명이 꽃피웠던 곳이지요. 섬은 바위와 언덕이 많아 넓은 농지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바다가 그들의 삶을 지켜주고, 또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미노아인들은 바다를 건너 상선을 보내며 무역을 했습니다. 올리브유, 와인, 도자기 같은 물품을 내보내고, 금, 은, 상아, 청금석 같은 귀한 재료들을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무역이 활발한 만큼 난파도 잦았고, 약탈자나 해적의 위협도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속 깊이 들어가 난파선의 화물을 건져 올리거나 얽힌 닻줄을 정리하는 다이버들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리스 크레타 섬 항공사진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설 속의 왕 미노스가 최초로 해군을 조직해 에게해를 지배했다고 기록합니다. 또 다른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 이야기를 하면서, 숙련된 다이버 스킬리스와 그의 딸 하이드나를 언급 합니다.

CCZiOTLUAAAySS9.png 스킬리스와 하이드나. 스킬리스는 적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갈대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폭풍 속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닻줄을 끊어내고, 난파로 흩어진 보물을 회수했으며, 심지어는 바닷속에서 은밀히 이동해 정찰 임무까지 수행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숨이 길었으면 “헤엄쳐서 긴 거리를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고 갔다”라는 기록까지 남아 있는지요.

이런 능력 때문일까요. 바다에 대한 지식과 수영 기술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페르시아인과 트라키아인과 같은 그리스 이외의 집단을 묘사하는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의 글에는 전쟁에서 수영을 할 줄 몰라서 전쟁에서 전멸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페르시아 전쟁 중 기원전 479년 8월 소아시아의 미칼레에서 일어난 그리스 연합군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인 미칼레 전투에서 트라키아인들이 전멸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전멸의 이유가 바로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으로 궁지에 몰린 이들이 모두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겁니다. 수영이 생존을 지켜주는 우월하고도 '정확한' 기술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외부인인 야만인들에게는 없는 능력이었다는 당대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혹시 바다에서 돌고래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언젠가 제주 바다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고대 미노아인들도 돌고래를 보며 감탄했을 겁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돌고래 벽화를 보면, 마치 그 순간을 기록해두고 싶었던 마음이 전해집니다.

크노소스의 돌고래 벽화

또한 다이버들은 일상의 여러 일에도 쓰였습니다. 어망이 걸리면 누군가 물속으로 들어가 풀어야 했고, 목욕할 때 쓰는 천연 해면(스펀지)을 채집하기 위해서도 잠수를 했습니다. 합성섬유가 없던 시절이니, 바다에서 직접 해면을 구해와 몸을 씻거나 설거지를 했던 겁니다. 이렇게 보면, 바다는 그리스인들에게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삶의 자원을 끝없이 제공하는 보고(寶庫)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잠수부의 무덤’이라는 특별한 무덤이 있습니다. 천장에 외로운 잠수부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단순히 다이빙 장면을 넘어 삶과 죽음,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는 어떤 은유처럼 느껴집니다.

잠수부의 무덤 개념도. 이미지: Brown University
잠수부의 무덤 안쪽 뚜껑 그림 상세

이렇게 바다와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술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이 되었고, 스스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물은 그저 몸으로 뛰어드는 세계를 넘어,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제로 발전해 갑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물의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