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꿈을 꿉니다. 물가에 사는 꿈. 그곳에서는 바다와, 그에 맞닿은 하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삭이는 모래에서 젖은 모래로 걸어 들어갑니다.
잠시 노닥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습니다. 숨을 참고 물속을 오가다가 물 위에 떠 하늘을 바라봅니다. 빛을 쬐고, 모래 위에서 책을 읽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습니다. 빛이 잘 들고 바람과 물소리를 품은 곳. 작은 방에는 책이 가득합니다. 구석에 놓인 흔들의자, 살짝 조율이 엇나간 오래된 피아노. 언젠가 엄마가 치던 듯한 악기 곁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하게 눈을 끔뻑입니다.
집에서 오 분쯤 걸으면 단골 카페가 나옵니다. 언제나 있어왔던 것 같은 공간.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그 길에는 작은 과일가게와 식료품 가게, 그리고 허기를 달래줄 빵집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저의 상상이에요.
이제 작은 상상놀이를 해볼까 합니다. 마음의 창으로 풍경을 떠올려 보세요. 날씨는 어떤가요? 화창한 날일 수도, 해무가 가득한 날일 수도 있습니다. 풍경은 어떤가요? 정갈한 도시와 해변이 보이나요, 아니면 바위와 해초가 가득한 헝클어진 바닷가가 보이나요? 각자가 떠올린 공간. 상상의 씨앗에서 저마다의 풍경이 움틉니다.
건축을 생각하는 계기와 방식은 사소하고 구체적일수록 살아있습니다. ‘내가 아는 공간’에서 시작해 점차 낯선 곳으로 옮겨가는 과정. 그 상상과 사색의 여정은 변화와 흐름을 품은 물과 닮았습니다.
물은 생활과 문화, 예술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단순한 물질을 넘어 감정과 상상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작용해 왔지요. 물이 좋아 물가에 사는 꿈을 꾸고, 언젠가 물이 되는 꿈을 꿉니다.「물의 건축」은 이런 꿈에서 출발합니다.
바슐라르와 물에 대한 질료적 상상
물은 고정된 형태가 없는 유동적인 질료입니다. 언제나 변화를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익숙한 이미지 너머 새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물의 건축」이란 여정을 함께할 길잡이로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를 불러옵니다. 바슐라르는 불·물·공기·흙 같은 원초적 요소들을 통한 ‘질료적 상상’으로 인간의 감수성과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물과 꿈』에서 그는 물의 다양한 형상이 우리의 내면과 상상력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탐구했습니다.
바슐라르에게 물은 단순한 자연의 한 요소가 아니라 여러 얼굴을 지닌 상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물은 생명과 근원의 표상이었습니다. 물은 삶을 낳고 죽음을 거두며, 풍요를 약속하는 원천으로 인류의 오래된 기억과 신화를 적셔왔습니다. 동시에 물은 변화와 운동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끊임없이 흐르며 형태를 바꾸는 물은 자유와 지혜를 불러오고, 유동하는 세계를 드러냅니다. 또 한편으로 물은 정화와 치유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힘을 지닌 물은 씻어내고 되살리며, 인간을 다시금 시작하게 하는 재생의 상징으로 자리합니다. 그러나 물이 언제나 온화한 것은 아닙니다. 넘치는 물은 파괴와 두려움, 광기의 형상으로 다가와 삶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물은 단순한 물질을 넘어, 생명과 변화, 치유와 더불어 파괴와 공포까지 담아내는 다층적 상징입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풍부한 의미망을 통해 우리가 물의 물리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감성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물과 건축을 잇는 상상
물에 대한 바슐라르의 생각은 건축에도 울림을 줍니다. 물로 건축을 묻습니다. 물을 생각의 고리로 삼고 건축을 엮어보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기능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교감하는 공간, 감성과 정서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이해해 보고자 시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건축물 외부 맑은 물의 이미지는 건축을 반영하여 주변과 조화시키고, 내부에 흐르는 물은 공간에 평온함과 치유의 힘을 불어넣습니다. 물의 유동성은 건축의 구조와 배치에 반영되어 자유롭고 유기적인 공간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흐르는 물, 변화하는 물을 통해 건축을 생각해 보는 산책길. 건축이 무엇을 ‘세워내는’ 행위라면,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는 성질을 지닌 질료로서 건축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합니다. 고정과 유동, 형식과 무형이 만나는 지점에서 물의 흔들림은 건축의 벽을 흔들고, 물의 깊이는 공간의 깊이를 일깨우며, 물의 빛은 건축의 빛을 확장합니다. 물은 건축을 낯설게 하고, 다시 살아 있게 합니다. 물과 건축을 잇는 상상으로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