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삼국지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어릴 때는 유비, 관우, 장비, 여포와 같은 무장들이 좋았고, 나이 들어서는 제갈량, 사마의, 곽가 같은 지략가들이 좋아집니다. 세상살이가 힘과 힘이 격돌하는 몸싸움보다 상대의 수를 읽는 싸움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나 다른 전쟁사에서 지략이 뛰어난 전략가들이 격돌할 때는 크게 이기거나 크게 지는 경우가 드뭅니다. 전략가들의 싸움은 치열하게 수를 읽기 바쁘고 큰 전투가 많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중국의 서북부를 장악하기 위해 북벌 원정을 시작하면서 장안을 지키던 사마의와 격돌합니다. 제갈량은 유선에게 5번의 출사표를 던지면서 북벌을 진행하였고,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격을 막아 위의 서북부를 지켜야 했습니다. 북벌은 촉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절대로 지면 안되었습니다. 위의 조예는 제갈량의 북벌이 거듭될수록 위기감을 느꼈고 대회전을 주장하던 장수들을 배제하고 사마의의 성내 고수 전략을 지지합니다. 제갈량의 5차에 걸친 북벌은 그 명성과 달리 큰 싸움은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촉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므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져서는 안 됩니다. 제갈량은 반드시 지지 않는 전쟁터를 선택해야 합니다. 촉은 위의 군대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단 한 번의 회전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유리하였습니다. 사마의는 장안을 포함한 서북부를 잃을 경우 자신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마의는 이기지 못하더라도 지지 않는 전쟁터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마의는 승패가 불확실한 회전을 피하고 성안에서 버티면서 지지 않는 전쟁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마의는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응전을 주장하여도 묵살합니다.
제갈량과 사마의는 질 수 없는 전쟁터를 결정하고 상대를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5차에 걸친 북벌에서 제갈량도 사마의도 크게 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마의는 결국 서북부를 지켜냈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보장받았고, 촉의 제갈량은 비록 서북부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촉의 군대를 그대로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합비는 전쟁으로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나 유복이 재건하여 장강의 핵심 요충지로 성장했습니다. 합비는 오가 위나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이었고, 위는 합비를 지키면 오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의 북벌로 인해 합비전투는 가려진 측면이 있으나, 장료를 무장에서 지략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전투입니다.
합비 공방전에서 손권의 오나라 군은 장료에게 연전연패를 합니다. 패배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손권의 지략이 부족하다거나 오나라의 병사들이 하북에서 힘을 못쓴다거나 오나라의 군사제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합비를 수차례 지켜낸 장료의 명성은 크게 올랐고, 오나라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장료가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그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 차례 합비전투에서 손권은 패하지만, 오나라의 군비와 전투력은 거의 대부분 유지되었습니다. 손권은 개별 전투에서 지더라도 군비를 보존하는 전략을 택하였고, 장료는 이기더라도 장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장강을 건너 합비를 치더라도 전투력 손실이 많아질 수 있는 원군의 도착이 늦어져 성 함락이 장기전으로 흐르면 후퇴를 하였습니다. 장료와 손권은 지략가로서 지지 않는 싸움을 하였습니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과 손권과 장료의 대결에서 전략가들은 지지 않는 전쟁터를 결정하고 적을 전쟁터로 유인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적이 유인되지 않는다고 무턱대고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습니다. 전투의 시작 전에 자신이 이길 수 없거나 이기기 힘든 싸움은 쉽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전략가들은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합니다.
손자병법에서 "적이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렸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갈 공명도 사마의를 만나면 겨우 지지 않을 수 있을 뿐입니다. 칠종칠금의 고사에서 보듯이 제갈 공명이 맹획을 만나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따라서, 전략가들은 전쟁을 하기 전에 이길 수 있는 싸움터를 먼저 선택하지만 상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전략가는 지지 않는 전쟁터에서 승부한다.
우리도 삶에서 여러 전략을 구사합니다. 기업과 기업 간의 경쟁이나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항상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피해를 입거나 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지금은 지더라도 다음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거나 지지 않는 전쟁터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승부를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프로젝트에는 지지 않는 전쟁터가 있습니다. 한 기업은 영상회의 솔루션을 도입하는 것에 보안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기업의 요구 요건을 충족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지 않는 전쟁터는 어디일까요? 고객과 강한 유대가 있다면 보안 관련 요구 조건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보안에 위배되지 않도록 제안의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하수는 경쟁하기 전에 이미 지고, 중수는 정면승부를 하지만 승부를 모르고, 상수는 이긴 후에 경쟁합니다. 예를 들면, 하수는 다수의 엔지니어들을 동원하여 제안서를 쓰고 최소 요건만 갖추어 가격으로 승부합니다. 중수는 가치 제안 Value Proposition에 집중하여 가격으로 승부합니다. 상수는 경쟁하기 전에 고객조차 모르는 중요한 요소를 짚어주고 신뢰를 획득합니다. 그리고 경쟁을 단순한 절차로 만듭니다.
모든 프로젝트에는 필승의 전략은 없습니다. 지지 않는 전쟁터가 있을 뿐입니다. 나보다 더 열심히 더 뛰어난 전략가를 만나면 다음을 도모할 뿐입니다. 하지만, 계속 지고 있거나 열심히 일만 하고 있다면, 어디서 싸워야 하는 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인생에서도 지지 않는 전쟁터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