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30대 가장이 고교생에게 맞아 죽는 현실
학교는 성장기 청소년들의 집합소다. 성장기의 청소년이라고 해도 결국 성인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쉽게 말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좋은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반사회적 인물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학교도 그렇다.
사회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 인물을 격리한다. 경찰이 구속하고 재판이 그것을 판단하고 집행한다. 무서운 강제력이다. 누구도 거기에 거역할 수 없다. 그러나 학교는?
교실에 있는 학생의 80% 이상은 선량한 시민이다. 따로 인성교육을 하지 않아도, 따로 관리를 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 둬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문제는 20% 정도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20%가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수업이고 학생들 대부분은 수업을 원하는데 수업이 싫고 학교가 싫은 몇 명이 수업을 흐린다. 그러면 다른 학생들은 분명히 수업에 방해가 된다. 이게 단순한 사실이다. 그러면 그런 방해 행동을 없애는 것은 누군가? 오직 교사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방해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나 도구가, 권위가, 제도가 교사에게 있는가?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학생의 방종을 효과적으로 커트해낼 어떠한 방법도 학교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말로 하는 선도, 교육, 주의, 제지뿐이다. 말로 하면 있는 방법 같은데 실제 학생이 여기에 순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것은 방법이 아니다. 학생이 그 선을 넘을 때 학생은 미성숙한 청소년이니까 일탈의 가능성과 자유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교원은 성인이며 사회적인 눈높이가 성인군자에 가깝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선을 넘을 수 없다. 교편이 사라진 지는 벌써 오래다. 옛 훈장의 회초리를 빼앗 아가 버린 자리에 어떤 것도 채워주지 않았다. 물론 교편 필요 없다. 이제 줘도 안 한다. 순간 감정을 못 참아, 혹은 열의에 못 이겨 손이라도 올라가면 바로 아동학대와 폭력으로 법의 심판을 받는데 누가 목숨을 걸고 거기에 기대겠는가. 얼마 전에 학생의 뺨을 한 대 쳤다가 3천만 원을 물어준 교사를 지척에서 보았다. 단언컨대 체벌이 다시 어느 정도 용인이 되는 제도가 생긴다 하더라도 절대다수의 교사는 두 번 다시 체벌을 하지 않을 것이다.
체벌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를 정확히 짚어 가리키는지 모르겠는데, 체벌이 사라지면서 모든 처벌이 사라졌다. 손들고 벌서기는 언감생심이고 수업 시간에 교실 뒤로 나가는 것도 안 된다. 학생의 학습권 침해이다. 심지어는 교사가 큰소리를 냈다고 고함을 질렀다고 아동학대로 고소된 경우도 있다. 책상을 쾅 치는 것, 책을 책상에 소리 나게 던지는 것도 다 걸린다.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반대로 학생들은 살판났다. 20% 미만의 반 학교적 학생에게 욕설은 예사다. 수업 시간에 학생끼리 욕을 하고 싸우고 주먹다짐도 한다. 그래도 교사는 별달리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기껏해야 벌점 주고 교내봉사, 학부모 상담 같은 뭐 이런 뜨뜻미지근한 것뿐이다. 이것이 단순히 수업 방해, 떠드는 학생 정도로 끝나면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학교폭력 상황이다.
가피해를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려운 학교폭력이 많은데, 그럴 경우를 제외하고 피해자가 분명한 경우 피해자는 이미 대부분 피해를 입었다. 언론에 나오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의 심각한 피해도 있다. 그런데 가해자는? 가해자는 이미 피해를 입히고 난 뒤라도 절대로 가해한 만큼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통계적으로 사실이다. 이건 법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얼마나 죽여도 절대로 사형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지 않은가? 그러면 가해자에게는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진다. 피해자를 가해자가 직접 살해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물질적 갈취나 폭력일 것이다. 금전적 갈취야 배상해주면 된다고 치자, 폭력에 대한 배상은? 치료비, 위자료 주면 끝일 것이다. 어떠한 정신적 피해를 입어도 대부분 그 정도이다. 웬만해서 학폭 가해자를 경찰에 넘기는 경우도 잘 없다.
단적인 예만 보아서 알 수 없을지 모르나 통계적으로 지은 죄에 비해 무거운 처벌을 받은 가해자는 거의 없다. 학교폭력사건의 대부분은 화해, 사과 이런 아름다운 결말을 권장하고 피해자의 용서를 유도한다. 가해자는 이미 벌어진 일이니 재발방지나 교육에 중점을 둘 뿐 행위의 처벌에는 생각보다 훨씬 관대하다. 왜냐하면 처벌로 인해 피해가 복구되는 것이 아니고, 자라나는 학생의 일탈을 처벌보다 교화로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학교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피해를 입고도 결국 지나간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된 부분이 있다. 만일 교사의 말에 힘이 좀 더 있어서 가해자를 선제적으로 억지하고 일탈 행위를 사전에 차단했더라면 아마도 피해가 없었거나 적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확률 이야기긴 하지만 가해 학생이 담임의 지도를 언제나 받아들이고 교실의 분위기가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교사가 수업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수업 방해 행위에 정당성을 가진 힘으로 제압하는 분위기라면 학생의 일탈 규모가 작아졌을 것이고, 따라서 폭력 행위도 규모가 작아졌을 것이라는 가능성 이야기다.
교실 붕괴, 학교 붕괴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교권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20% 미만의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정당하게 제지해 선량하게 수업에 충실한 다른 80%의 학생을 지키자는 것이다. 물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도 소중한 국가의 미래이며 자라나는 새싹이니까 상처를 받게 하면 안 되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다른 다수의 학생은? 그들은 귀하지 않나? 왜 소수의 일탈 때문에 선량한 다수가 피해를 보고 잠재적으로 더 큰 피해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체벌이 안 된다면 강제 타임아웃, 배제, 학부모 소환 교육, 공개사과, 물질적 보상 등 여타 많은 방법도 있다. 무식한 물리력은 비민주적이니까 유식한 논리력으로 법적 강제력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가령 길거리에서 행인에게 시비를 걸거나 욕설을 하면 경찰이 잡아간다. 그다음 과정은 정해진 것이 있겠지만 최소한 즉각 분리는 시행되는 것이다. 가해자를 피해자와 함께 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생이 수업 시간에 다른 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상황이 와도 누구도 그 학생을 분리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강제력이 없다. 수업이 엉망이 되어도 교사는 하지 말라는 소리만 반복할 뿐 다른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동안 그 학생 때문에 정상적인 수업을 못 받는 다른 학생들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다년간의 경험과 수많은 학교의 공통된 특성으로 학급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은 2~3명이다. 절대로 다수가 아니다. 그런데 교사의 노력과 투자는 이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들어간다. 나머지 선량한 20여 명은 거의 버림받는 것이다. 더 안 해줘도 예쁘게 잘 자라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 탕아들 때문에 학교로부터의 혜택이 줄어든다. 문제 학생 소수에게 쏟아붓는 교사의 노력으로 인해 대다수 일반 학생에게 돌아갈 관심이 줄어든다. 그런데 왜 이것이 지도의 책임인가? 왜 이것이 교사가 문제 학생을 더 잘 지도해야 할 이유가 되는가? 선량한 보통 학생들을 버리고 왜 길 잃은 양을 더 찾아다녀야 하는가?
절대 다수인 선량한 학생들이 수업 방해 행동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를 수 없이 봐왔다. 왜 국가는 모든 학생을 공정하게 대하라고 하는가? 피해를 보는 학생에게 더 잘해줄 생각을 못하고 왜 피해를 입히는 학생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주라고 하는가? 그것이 진정한 공정인가?
이미 무너져버린 교권, 이제 세우기는 어렵다. 기대도 안 한다. 선생 나부랭이 따위가 사회의 인정 못 받아도 좋다. 그러나 내 수업을 원하는 수많은 학생에게 미안해서라도 수업 방해 학생을 제지하고 싶다. 내 힘으로 안 되니 제도의 힘을 빌리고 싶다. 하루빨리 그런 제도적 뒷받침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수업 방해를 줄이고 선량한 다수의 보통 학생에게 더 투자해주고 싶다.
학교폭력이라고 학교의 테두리에 두지 말아야 한다. 폭력은 폭력이다. 피해 회복을 못한 가해자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피해자가 용서 안 하는 가해자를 왜, 어떻게 학교가 용서해야 하나? 학교폭력을 학교의 범위에서 지우고 폭력이 발생하면 경찰이 개입해야 한다. 학교에서 다치면 병원에 가듯, 학교에서 발생한 폭력에도 경찰서에 가야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일이지 학교의 일이 아니다. 이런 단순한 진리를 이 사회는 부정하고 있음이 안타깝다.